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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중문면 “11월 5일 (학교가) 불탄 후 계엄령이 아직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들어갈 곳이 없으 니 학생들은 각자 집에 산재돼 있었거든요. 그러니 이경주 선생하고, 원문상 선생이 부 르는 거예요. ‘학생들을 소집해라. 학생을 소집해서 뭔가 조직을 가져라. 그러지 않고 집안에 뿔뿔이 해체되어 있으면 다 죽는다. 아무 도움도 안 된다’ 해요. 저는 ‘알았습니 다!’ 하고, 중문 파견대 4중대장 서봉호 그분한테 갔죠. ‘제가 중문중학원 학생 책임자 입니다. 우리 학생들을 동원 소집하겠습니다’ 했죠. 그때는 각 마을에 가려면 증명이 있 어야 했어요. 그래서 ‘몇 사람 제가 선발을 할 테니까 허락을 해주십시오’ 하니, ‘뭐 할 거냐?’고 해요. 저는 ‘학교집은 타버렸지만 어쨌든 우리도 사태진압에 일익이 되어야 하 지 않겠습니까?’ 하니, ‘그래, 고맙다!’고 하면서 명단을 제시하라고 해요. 저는 그 후 어 렵게 연락들을 취해서 학교가 잿더미가 된 열흘 후인 15일날 잿더미 위로 학생들을 모 았어요. 저는 모인 학생들에게 ‘이제 어떻게 할거냐?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결코 신상 에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해서, 조금 대담성 있고, 체격 좋은 사람들로 돌격대를 편성했어요. 그때는 학련이 들어오지 못한 때니까 대동청년단으로 해서 그들을 대동학 생 돌격대로 했어요. 당시 1학년은 제외하고, 2, 3학년 학생 약 40명이 가입했어요. 그 리고 합숙소를 어디다 정했느냐 하면… 지금 제주은행 자리예요. 당시 오두생 선생네 집인데 대동청년단이 앞집에 있으니까 위기 시는 출동하기도 좋고, 소집 관계도 좋고, 연락 관계도 좋고 여러 모로 좋아 놀고 있던 그 집을 빌렸죠. 그 후 우리는 거기서 합숙 을 하며 열두 개 마을로 잠복근무 나갈 때 두 사람씩 편성해서 군인 보조로 갔어요. 경 찰하고는 안 다니고 군인하고만 다녔어요.” 이치근은 대동학생 돌격대로 활동하다가 1949년 초 학련이 있는 것을 알고 서 귀중학련으로부터 조직 결성 허가를 받고 중문학련을 조직했다. 그 후 중문학련 은 토벌대 협조는 물론 선무공작대로도 활동했다. 1949년 초 중문학련 학생으로 조직된 선무공작대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며 주민들을 위로하는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언했다. “1949년 3월에 학련은 선무공작대라고 위문공연단을 만들었어요. 그때 공연단은 희 극과 비극을 공연했어요. 희극은 「아, 추워라!」라는 제목이고, 비극은 「나는 무엇 하러 왔느냐?」였죠. 그때 우리가 공연가려면 파견대에서 차량도 지원해주고, 군에서 신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