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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주민들은 이날 투표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대부분 한라산 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5월 8 일, 9일경에 중산간 마을인 월평, 영평(알무드내) 등지로 올라갔다. 화북이 잠깐이나마 빈 마을이 된 7백년 역사에 전무한 현상이었다. 단언컨대, 90% 이상이 산쪽으로 피신 하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피신을 하면서 2~3일 식량을 가지고 갔으며 이때 비가 몹시 와서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그러던 1948년 말 대토벌 시기에는 마을 여기저기에서 연일 총살이 집행됐다. 주민들은 공포 속에 살아야했고, 시신 처리 같은 뒷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런 사 실은 군사기록에도 나타난다. 제주도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호는, 1949 년 2월 27일 군법회의 사형 확정자 39명에 대한 사형집행 장소를 화북인근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 말은 ‘화북리의 별도봉과 사라봉 인근, 혹은 가릿당동산 지역’ 이 학살장소라는 뜻으로, 당시 이곳에는 시신이 넘쳐났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화북2구 거로마을과 부록마을 사람들은 1949년 1월 7일 동국민학교로 소개했 다가 3~4개월 후 돌아와 마을을 재건했다. 처음에는 지금의 거로하동 지경 1만 평 부지에 성을 쌓아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출입문은 서문과 동문 두 군데 있었 고, 8개소에 초소막을 두었다. 이들은 6년간 성담 안에서 살다가 경비가 해제된 1954년부터 거로마을에 돌아가 생활하기 시작했다. 부록마을과 3구의 황새왓은 그보다 훨씬 늦은 1960년대 초에야 복구됐다. 원래 화북3구 황새왓은 작은 마을이 여럿 합쳐진 마을이었다. 때문에 4·3 후 잃 어버린 마을도 생겨났다. 2구의 큰터왓과 3구의 녹낭굴 같은 마을은 지금도 복구 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화북동 향토지』에 따르면 화북리 4·3성은 동쪽으로는 벌랑마을 바다쪽에서 시 작하여 서쪽으로는 넓은밭 한복판을 지나 동곤을 화북천 바닷가까지 이어지는 장 성(長城)이었다. 주민들은 성을 쌓으면서 고려시대의 환해장성과 이어 축조하기 도 했다. 1948년 12월 이후 마을 모든 주민들이 동원돼 다음해 보리 이삭이 나올 무렵까지 3~4개월이 걸려 완공했다. 성의 높이는 얕은 곳이 3~4m, 높은 곳이 5~6m 정도였고, 폭은 아랫쪽이 2m, 윗쪽이 1m 정도였다. 당시 성문은 동서쪽 과 남쪽에 세 개가 있었다. 이 성문 이름은 지금도 남아 출입문이 있던 곳을 동문, 남문, 서문이라 부르고 있다. 성 위에는 약 100m 간격으로 초소를 만들어 주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