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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는 손병기(부)와 김재숙(모) 사이에 아들 권섭, 양성, 주섭 중 차남으로 1921년1월7일 에 출생. 대전충학교와 예산농고 졸업 후 일본국 군속으로 강에 정용되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에서 고려청년독립당을 결성하여 항일의거를 모의하였다. 그러나 나이 어린 16세의 당원의 고발 로 의거가 발각되자 의거일 하루 전날인 1945년 1월 4일 손양섭, 노병한, 민영학이 무기고 를 탈취하여 일본 헌병대장 형무소장 등을 사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영학은 치명상을 입고 자결하였다. 그 후 손양섭, 노병한은 현주민의 도움으로 삼개월간 도피생활을 하던 중 포위되어 탈출이 불가함을 알고 서로 방아쇠를 당겨 순국하였다. 헌병대가 와서 시신을 확인하고 거적을 덮어 놓았는데, 두 사람과 친분이 있던 현주민들이 화장하여 모셔두었다. 해방이 되자 대전 갈마동에 사는 지인이 유골을 갖고 찾아와 김태숙(모)에게 사실을 고하였고 유골은 뒷산에 임시 매장하였다. 후에 같은 고려 청년 당원 안씨라는 사람도 눈물을 흘리며 동일한 증언을 하였다. 위 사실들은 어머니(김영길) 통하여 아들 중완에게 전달되었고, 조모(김해숙)께서는 6-7세의 손자 손중완에게 "네 삼촌 유골을 찾으면 내 옆에 꼭 묻어다오"라고 늘 말씀하셨다. 70년이 지난 이제야 할머니의 말씀을 이루며, 우리 집안을 지킨 할머니, 어머니께 이 글을 받칩니다.
2015년11월 손자 손증완(원철), 손중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