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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4월30일 수요일 2 (제220호) 관향조 종친회 밀양박씨 규정공(휘 현)과 그의 아드님 좌랑공(휘 문유), 증손 전서공(휘 침)의 시향이지난4일오전11시있었다.이날시 향은 규정공과 좌랑공의 단소에서 종식 (鍾植, 숙민공 후 전주) 집례관의 창홀에 따라규정공단소는용순(用淳,숙민공후, 전주) 종수(鍾秀, 공간공 후 대전), 병목 (炳穆,참판공 후,경산)각각 헌관으로 헌 작하고 충기(忠基, 문도공 후 전주) 현종 으로 독축으로 봉행하였으며,좌랑공에는 초헌관 용호(연안공 후 부천), 아헌관 상 현(문도공 후, 금산), 종헌관 원순(월봉공 후부안),축관종엽(문도공후전주)현종 이각각소임을맡았다. 단소 제향 후에는 우리나라 팔대명당으 로꼽히는전서공의부인밀산박씨묘소에 서 전서공과 부인 밀산박씨, 현풍곽씨 제 향을재균(참판공후경산)집례관의창홀 에 따라 성율 규정공파대종회 총괄부회장 (해백공 후 서울)이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병년(숙민공후전주)축관의독축에이어 노문(문도공 청주) 아헌관, 병각(대간공 후 괴산) 종헌관의 헌작으로 엄숙 봉행되 었다. 규정공 단소에서 전서공 밀산박씨의 묘 소 가는 길은 험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고령의종친들이즐거운마음으로오르 는 것은 아마도 비봉귀소 혈명(飛鳳歸巢 穴名)으로부르는우리나라8대명당에자 리해선조의음덕을기리려는후손들의정 성이아닌가싶다. 봉서재(鳳棲齋)는 밀양박씨 규정공파 전서공종중의재실(齋室)로서규정공파3 5개 소파 중 간의공파(휘 사인),군수공파 (휘사민)를제외한32개소파200여만명 의 요람(搖籃)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고 속도로 완주IC에서 전주방면으로 300여 미터 가다보면 신호등이 있는데 좌회전을 하면 바로 봉서재 입구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에는 약 5.8㎞ 남은 것으로 안내를 한다. 군데군데 안내 표지석이 있어 찾아 가기는 매우 쉽다. 완주군 간중리의 종남 산과 서남산 자락의 봉서골 산수 수려한 곳 1,000평의 넓은 대지에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있다. 삼문인 정상문(呈祥門)을 들어서면 우 측에 전통한옥 4칸 팔짝 지붕의 구재(舊 齋)와 한옥형식을 갖춘 콘크리트구조 7칸 팔짝 지붕의 본재(本齋·新齋)와 동·서재 (東·西齋)가한눈에들어온다. 봉서재 최초건립은 아쉽게도 자료가 남 아있지 않아 후손 원종(遠鍾) 公이 지은 ‘선조비 정경부인 밀산박씨 산소 변혁 사 실기’를근거로유추해볼수있다.이에따 르면 뷺븣이렇게 하여 드디어 1840년(헌종 6년 경자)에 정경부인의 묘소를 개봉축하 고 석물을 세워 새롭게 단장한 후 산소를 관리하게되었으며,얼마 후재각(齋閣)을 세우고 위토(位土)를 장만하여 대대로 수 호할수있는규모로갖추게된것이다.뷻라 고 기록하고 있어 1840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일제 강점기를 지나 지금의 고양시 원당의 추원재를 건립하기 전까지봉서재는밀양박씨규정공파전종 원의 구심점 역할을 함께하였을 것으로도 보인다. 봉서재는 수차례 중수를 거쳤으나 화재 로 전소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본 재에 걸려있는 화산 권용현 선생이 지은 봉서재기 신재(鳳棲齋記 新齋)에도 구재 (舊齋)자리에지었다는기록과함께임술 년국추(壬戌年菊秋)라고되어있어화재 로 전소되어 1922년 음력 9월에 새롭게 지 었다는것으로보아현재의건물은1922년 건립되었음을유추해 볼 수 있다. 이후 196 4년과 1978년 대대적인 중수에 이어 수시 로 보수를 거쳤고, 지금의 본재는 1981년 에건립되어지금에이르고있다. 밀양박씨규정공봉서재시향봉행 규정공父子,증손전서공(휘침)의음덕기려 전서공과 부인밀산박씨,현풍곽씨묘역제관, 왼쪽부터종식고문, 재균집례, 노문아헌관, 성율 초 헌관,병각종헌관 순 규정공 후 공효공 파종친회는한식일을 맞은 지난 4월 5일 파 조(공효공, 휘 중손) 의 추모제향을 우천 으로 인해 파주시 탄 현면 오금리 84, 중추 재에서봉행하였다. 이날 제향 제관은 초헌관 성율 대종회총괄부회장(해백공 후),아헌관동열이사(공간공후),종헌관 태강 이사(김제공 후), 집례관 남수 개발 이사(공간공 후), 대축관 상일 이사(문도 공후),좌집사상신청년회장(공간공후), 우집사 소파대의원(문도공파)이 각각 맡 아질서정연하고차분하게진행하였다. 음복과 오찬 후 같은 장소에서 공효공 파 종친회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임기가 만료된 회장 직무대행 종대(문도공 회장. 상용 전 화장의 급서로 잔여임기)후임으 로 박낙규 규종공파 대종회장을 선출하 고, 감사 2명 중 1명은 형신(공간공파)이 유임되고 또 한명은 공효공파 총무이사 로 임기가 만료되는 노문(문도공파 총무 이사븡규정공파부회장)을선출했으며,부 회장과 이사 선임은 신임회장에게 위임했 다. 공효공파는규정공파산하35개소파중 27개를산하에두고있으며규정공파대종 회장이공효공후손일때는회장을맡는다 는 회칙 조항에 의해 선출된 것이고 이사 는 27개 소파에 1명씩 안배하도록 되어 있 다. 한편공효공파임시총회를마친뒤엔대 절해 타고 온 버스를 타고 인근 파주시 월 롱면 덕은리 산 92에 설단 한 전서공(휘 침) 제단에 비를 맞으며 세일사를 공효공 제관이그대로맡았다. 전서공의제단은전주봉서재윗산의정 경부인 밀양박씨 산소에 설단되어 있으나 실제 묘가 있는 북한 장단군 장도면 사시 리를 가는 로정에 위치한 이곳에 몇 년 전 설단향사를모시고있다. 공효공의 휘(諱)는 중손(仲孫), 자(字) 는 경윤(慶胤), 호(號)는 묵재(默齋)또는 백당(栢堂)으로시호는공(公)의부음(訃 音)을 접한 세조임금이 경순사상왈 공(敬 順事上曰 恭)이요 자혜애친왈 효(慈惠愛 親曰 孝)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부조지 전(不 튐 之典)을내려청주시옥산면(玉山 面)신촌(新村)마을에 부조묘가 있다.141 2년(태종12.임진)정월(正月)에태어나1 426년(세종 8. 병오)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해 가을에 배위(配位)를 맞이 하니남평문씨(南平文氏)로공조정랑(工 曹正郞)승조(承祚)의따님이다. 공께서는1435년(세종17.을묘)4월7일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 (集賢殿博士)에제수되어벼슬에올라요 직을두루거쳤으며문장이뛰어나사헌부 (司憲府)집의(執義)때인 1449년(세종 31. 기사)8월3일에는동료선비구치관(具致 寬)이 의정부 검상 벼슬에 있다가 김종서 (金宗瑞)의 종사관(從 事官)이 되어 관서 지방(關西地方)으로 떠나매 송별의 시 (詩)를 지어 주기도 하였는데, 이때 지어 읊은 시(詩)븮관서(關西)에 종사관으로 가 는구검상(具檢詳)을보내며븯라는시는훗 날에 동문선(東文選)에 오른 당대의 명시 (名詩)이기도하였다. 1456년(세조 2) 2월 4일 예문관 대제학 (藝文館大提學)에 오르고 형조(刑曹),예 조(禮曹)판서를 역임한 후 1457년 3월에 는밀산군(密山君)에봉해지고우참찬(右 參贊)에올랐다가좌참찬(左參贊)으로승 차하였다. 1466년(세조 12. 병술) 5월 26일 에 하세(下世)하시니 향년(享年) 55세이 셨다. 공의 부음(訃音)을 접한 세조는 경 순사상왈 공(敬順事上曰 恭)이요 자혜애 친왈 효(慈惠愛親曰 孝)라는 시호(諡號) 와함께 부조지전(不 튐 之典)을 내려 제사 토록했다. 공효공세일제봉행 공효공파종친회임시총회열어박낙규회장추대븣전서공세일사같은날봉행 공효공제향이지난한식일에있었다.우천으로인해재실중추재에서봉행후제관이함께하고있다. 전서공세일사봉행후제단앞에서참례한 후손들이 함께하고있다. 박낙규회장 밀양박씨규정공을비롯한전서공,참판 공등상조3위와임란공신동계공·매헌공 등5위의위패를 봉안하고있는전남 고흥 군 두원면 학곡리(두곡마을)소재 숭양사 (崇陽祠) 시향이 지난달 3월 29일(음3.1) 있었다. 숭양사는 임진왜란에 순절한 충신열사 와 효자로 이름난 동계공·매헌공 부자(父 子)를 배향하고 있어 과객(過客)들은 충 효(忠孝)의산실이라한다. 숭양사는 헌종 기유(己酉, 1849년)년에 흥양현(현 고흥군)과역면 가산리 의 봉암 사(鳳巖祠)에 규정공(휘 현), 동계공(휘 은춘), 매헌공(휘 응수) 3위가 옛 흥양 출 신 충신열사들과 함께 배향 되었는데,186 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향사가 끊겼다가 1935년(乙亥) 후손들의 종의로 현 위치에 사당 3칸,강당(敬慕齋) 4칸, 신 문(忠義門), 외삼문(興慶問), 고직사 3칸 을 창건, 숭양사(崇陽祠)라 이름하고, 규 정공(휘현)을주벽으로전서공(휘침)참 판공(휘 눌생) 동계공(휘 은춘) 매헌공 (휘 응수)을 배향하여, 매년 춘 추로 정일 (丁日)에지역유림과후손들이향사를받 들어오다,60여년의풍상으로사우가퇴락 하여 1997년에 지방정부 지원금과 후손들 의성금으로대지를매입확장하고현재의 모습으로중건(重建)하여매년음력3월1 일에향사를올리고있다, 숭양사의 숭양(崇陽)이란 복양(復陽) 또는광복(光復)과같이사당을다시빛나 고 높게 회복하였다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 순절한 동계공 휘 은춘 (殷春)은 1544년생으로 1576년 33세에 식 년무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주부, 첨정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진중에 자 원, 종군하여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붉 은 갑옷을 입은 적장을 쏘아 죽여 전투를 승리로이끌자,이순신이그장재(將材)를 인정,선봉으로내세웠다. 이듬해 5월에는 경상도의 감사와 병사 (兵使)로부터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보고 를 듣고, 이순신의 명을 받아 진주의 사정 을 정탐, 보고하였다.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된 뒤에도 계속 종군하면서 화전(火箭)을 쏘아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 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동부사 (仁同府使)에임명되었다. 1598년 겨울, 통제사 이순신이 명나라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적군을 노량해상 에서 요격할 때 명나라 군중에서 약속을 어겨 우리 장병 중 많은 사상자가 나게 되 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가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 되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흥양(興陽) 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가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봉암사가 훼철 되자 고흥(高興)의 숭양사(崇陽祠)에 아 들박응수와함께배향 되었다. 동계공의아들휘응수(應秀)의字는한 서(漢瑞), 호는 매헌(梅軒)으로 1566년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강개하고 효성이 지극 하였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 년(선조25)임진왜란이일어나선조가서 울을 버리고 피난하자, 곧 의주 행재소로 달려가호종(扈從)하였다. 윤두수(尹斗壽)·이항복(李恒福) 등의 천거로 중부별장(中部別將)을 제수 받았 고, 이듬해 환도 후는 판관에 임명되었다. 1598년 아버지가 해상에서 전몰하였다는 소식을듣고왕에게출정을자청하여어구 마(御廐馬)와 궁시(弓矢)를 하사받았으 며,남해로내려와통제사이순신(李舜臣) 을 만난 뒤, 정기수(鄭麒壽)·이완(李莞) 등과 함께 적을 무찌르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아들 박경추(朴慶秋)·박경상(朴慶 祥)·박경운(朴慶云)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때의병을일으켜삼대가임란구 국(臨難救國)의모범을보였다. 동계공과 매헌공의 충의사적은 븮호남삼 강록(湖南三綱錄)븯, 븮이충무공전서(李忠 武公全書)븯에전해진다. 규정공후고흥문중숭양사시향봉행 임진왜란에순절한충신열사와효자븣동계공·매헌공부자(父子) 묘전에서 진설하고 있는 종원들에게 ‘제물 준비에 힘들지 않으세요.’라는 말에 제물을 준비한 정규 전 회장(고흥)은 “누 가 하면 어떻고븣 해물이 풍성한 우리(고 흥)가 해야지”라는 말씀에 진정한 애종을 엿볼수있었다. 원모재에서가진개좌에서는재균전회 장이형상고문에게집례를맡아달라는청 (請)에“이제젊은사람들이해야한다”며 양보하는 모습에서는 육영의 의지 또한 볼 수 있어 이처럼 아름다운 향연 속에 봉 행된 제향은 선조님께서도 감읍(感泣)할 것이며종중의미래는밝아보인다. 그리고 이날 제향은 재균 전 회장의 집 례로참판공묘역과아드님충양공단소에 정해진제관이들어서질서정연하고차분 하게 진행된 가운데 제관은 다음과 같다. (참판공/충양공) △초헌관 병목(경산)/단 규(고흥) △아헌관 종희(고흥)/병석(부안) △종헌관 평식(부안)/ 병욱(경산) △축관 병인(경산)/ 종연(고흥) △산신 종단(고흥) △송탄공분헌관종연(고흥)-이상- 참판공(충간공)파 파조는 규정공(휘 현)의 현손으로 호조참판을 지낸 휘 눌생 (訥生)으로 자는 돈지(惇之) 호는 운수 (雲쑴 )이다. 호조전서(戶曹典書) 휘 침의 3남으로 1409년(조선 태종9년) 36세에 문 과에 급제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을 시 작으로 두루 요직을 거쳐 세종 때에 훈련 원지사(訓練院知事)와 1448년(戊辰)에 호조참판에올랐다. 39년의 관직생활을 끝으로 1449년(己 巳)8월 7일 壽 76세의 일기로 하세하니 전 북완주군용진면상삼리각씨산에안장되 었다.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伍 成)에 증 직(贈職)되고 시호(諡 煮 )는 충간(忠簡) 으로고흥(高興)숭양사(崇陽祠),장흥세 덕사, 경산(慶山) 율산서 원(栗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배위는양천인중추부 사허해의따님이다. 이후 후손들은 경북 경산,전남 고흥,보 성, 전북 부안으로 각각 세거지를 옮기면 서 경산문중, 고흥문중, 부안문중 등 삼문 중(三門中)을 중심으로 종사(宗事)가 이 루어지고, 전북 완주군 용진면 상삼리 관 전마을 소재 ‘원모재’와 마을건너 각씨산 의 참판공 묘소 세일사 또한 이들 삼문중 이차례로제수를마련하고정성스럽게선 영봉사를하고있다. 밀양박씨참판공시향봉행 개좌열어제관분정븣후진양성위해고령종친은양보하고젊은종친을솔선해야,아름다운 미담엿보여 참판공제향에앞서개좌를갖고분정된제관이 원모재에서기념촬영을하고있다.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