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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3월31일 월요일 2 (제219호) 제 의(祭儀) 제사란 넓은 의미로는 널리 천지신명께 복을 비는 의식을 뜻한 다.그러나오늘날우리가말하는제사는돌아가신조상에대해애 경추모(愛敬追慕)하는의식을 뜻한다.조상을공경하고추모하는 정과 조상숭배는 신앙으로 여겨져 오늘날 우리 자손들은 조상을 숭배함으로써 재앙과 화를 면하게 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돌아가 신조상에대해제사를지내는것을자손의도리라고굳게믿고있 다.예서에는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는 명문은 없으나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는 뜻은 함축되어 있다.제사를 지내는 데에있어서가장소중한것은 좋은제기와 푸짐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조상을 공경하고 추모하는 정성을 다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제사는 각자의 분수와 환경에 따라 알맞게 지내되 정성 을다하는것보다더소중한것은없다고생각된다. 그러나 최근 각 종중의 세일사 또는 시향(時享)을 보면 여러 사 람들이 모이다보니각자주장하는설이 많아중구난방격으로 정 확한 해법을 찾지 못한다. 이에 밀성(밀양)박씨대종회는 본보에 의뢰하여 숭덕전과 숭성전 그리고 밀성대군 이하 각 중조파의 제 향과부조묘,가정기제사등의절차를한데묶어책자(가칭밀성재 의례집)을만들기위해수년전부터준비하고있어이제조만간마 무리될예정으로이번호에는밀성박씨행산공파대종회에서주관 하는행산재제례를소개해보고자한다. 행산재는밀성박씨행산공파의대표재실이다.행산공파는우리 박씨의 적장자(嫡長子)인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의 아우인 휘 세균(世均)을 파조로 하고 공(公)을 비롯 두 아드님의 단소를 후 원에 세우고 매년 음력 3월10일 춘향과 10월 2일 오전 8시에 향화 를올리는데전일입재하여몸을정결하게준비한다. 행산공과 두 아드님의 묘소 실전은 고려 말 조선개국에 참여하 지 않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면서 실전되지 않았나 추정해본 다.행산재를들어서면먼저‘광효븯(廣孝)라는큰글자가들어온다. 이는 행산공의 아들 도은공이 부친을 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 때 고려왕으로부터 하사 한 찬궤(饌饋,식사를 권함)와 광효규모 (廣孝規模)4자를사액(賜額)받은것으로집안내역을알아볼수 있다.평소의바름이효에서비롯된것으로풀이할수있을것이다. 행산재는 1955년 창건되었으며,정대문인 동원문(同源門)을 들 어서면정면에정당인행산재(杏山齋)가있고우편에동재(東齋) 효우당(孝友堂)이, 좌편에 서재(西齋)인 치각실(致慤室)이 자리 하고 있다.정당을 돌아 후원 삼문(三門)을 들어서면 행산공 삼부 자의 단비(壇碑)가 자리잡고 있으며, 서재 후편에는 관리사와 공 궤청(供饋廳)이 있고, 문 밖에는 그동안 행산재를 수호해온 이력 이담긴헌성비등이있다. 행산공파는경남청도군풍각면에남강서원(2024.6월호제의참 조)과전북전읍의노양서원과전북전주시에청하서원이있다.그 리고 부조묘는 경남 밀양시 부북면의 국담 박수춘 선생의 묘우가 있는데노양서원과청하서원은남강서원지역유림주관으로봉행 하고 있어 남강서원과 같은 4변4두의 진설 등 절차가 매우 흡사하 여서원의창건과봉안신위에대해소개한다. △노양서원,전북특별자치도정읍시상흑길44,(흑암동) 노양서원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숙종(肅宗) 15 년(1689년)에 정읍에서사약(賜藥)으로사사(賜死)한후숙종(肅 宗) 19년(1693년)에 고암서원(考巖書院)을 창건하여 175년간 향 사(享祀)하여 오던중 고종(高宗)5년(1868년)에 대원군(大院君) 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당초의 사우(祠宇) 및 서원(書 院)이철폐되었다. 철폐된지85년후인1953년에유림(儒林)들의발의추진(發議推 進)으로 성균관(成均館)과 호남(湖南)의 향교(鄕校)들의 결집 (結集)하여 서원(書院)을 창건하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두남(斗南) 박세경(朴世經)선생을 추배하여 노양서원(魯陽書院)이라 하고 매년 음력(陰曆)3월1일에 향사(享祀)하여오다가 2002년에 유림 (儒林)들의 발의로 성균관(成均館)을 비롯하여 호남사대향교(湖 南四大鄕校)와 全羅北道 24개 향교(鄕校)의 협의로 현암공(玄巖 公) 박재(朴載)선생을 추배향(推配享)으로 위패(位牌)를 봉안 (奉安)하여향사(享祀)하고있다. 현암박재선생은세유(世維)·세경(世經)·세위(世緯)삼형제를 두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이에 장자 세유(世維) 종파(宗派)이고 차자 세경(世經)은 중파(中派) 셋째 세위(世緯)는 계파(季派)로 각각 나뉘어 소파조(小派祖) 각기 번창하였다. 삼형제 모두 뛰어 난 학자로 지역의 문풍을 일으켰으며 이중 차남 세경(世經)은 우 암 송선생의 제자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다.우암 선생의 유배지 까지 찾아다니며스승의 예를 다하였고,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서 거한스승에대한예를다했다. △청하서원,전북전주시완산구중인동(모악산입구) 청하서원은 사계 김장생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사계선생의 문 인으로 사계선생의 높은 학덕에 견주어 볼만한 매포 박동립 선생 과 그의 아우 청류당 박동현 선생,국난에 창의한 지곡 유조 선생, 사계선생의 문묘배향을 상소한 매포선생의 증손 매산 박대복 선 생을 배향한 곳으로 어떻게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 만연대는수백년전으로추정 하고있으나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단을세워제향을올 리다 1968년에 복원되었다.배 향된김장생은조선중기의정 치가이자 사상가로서 임진왜 란 때, 군량미 조달로 공을 세 우고 정묘호란 때는 노령임에 도 불구하고 의병을 모집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 장섰던숨어있는충신이다.그 러나1613년(광해군5년)에서 얼들이일으킨역모사건(계축 화옥)에 연루되기도 하고, 인 목대비 폐모논의(廢母論議) 가일어나북인이세력을얻자 스스로 낙향하여 예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힘썼던 인물로 조선시대 커다란 위기가 있을 때마 다 문신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자리를 지킨 숨은 공신이기 도하다. 선생은 종사랑(從仕郞) 휘 정민((廷敏)공과 어머니 면천복씨 (沔川卜氏)와의 사이에 5남1녀 중 둘째 아들이다. 1566년 12월 13 일 전북 완주(현 전주)에서 태어난 선생의 이름은 동립(東立),자 (字)는 여신(汝信), 호는 매포(梅圃)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 격하였다. 선생이어머님을 모심(奉養)에어린아이같이 하여잠시(暫時) 도곁을 떠나지아니하고밤에는 부모의잠자리를보아 드리고이 른아침에는어머님의밤새안부를묻는등효성을다했다.어머니 께서구십구세(九十九歲)에평안하고조용히세상을떠나니선생 의나이칠십칠세였다.초상(初喪)치루기를예경(禮經)과같이하 여삼년을 지내고일 년을더하여마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효성 (孝誠)이지극하다하였다. 선생이지은 충효잠에이르기를그 처음에백성이나니 잡은떳 떳함이 고르도다. 충(忠)이라 이르고 효(孝)라 이르매 그 이치가 어찌갈렸다하리오마음이체( 흐)를궁행(躬行)하고잠간(暫間) 사이에 터럭만한 것이다. 새에는 반포(反哺)하는 까마귀가 있고 풀에는 해바라기가 있도다. 사람이 가장 신령(神靈)한데 감히 소 홀히 잡고 가지리오. 어찌 자기(自棄)하여 저 무지(無智)함이리 오.이로써스스로일깨우니때때로보인것에부칠지니라.하였다. 선생께서 1646년(丙戌) 9월 24일에 졸(卒)하시니 향수 81세로 어진사람은반드시장수한다는말을믿어헛되이않은것이다. 선생은광해군이인목대비를경운궁에유폐시키는등폐모론이 기승을 부리자 유생들과 상소하고 대궐로 달려가 극력 반대했지 만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돌아와 븮남명유대조(南溟有大鳥) 남 쪽 바다에 큰 새가 있으니,기우삼천장(其羽三千丈)그 깃털 길이 가삼천질이요.익격속하시(翼擊屬何時)날개친지가어느때였던 가, 풍운한상방(風雲漢上放)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한강위로 추방 되었지븯라는 시 한수를 남겼다. 이는 큰 뜻을 품고 상소를 올리고 폐모반대주장을 폈지만 결국 유희분에 의해 무산된 아쉬움을 토 로한것이다. 이괄의 난에 창의하였고, 뛰어난 문장으로 호남의 고봉 기대승 과같은큰거유들과교유하였다. 청류당 선생은 매포선생의 아우이다. 공(公)의 휘(諱)는 동현 (東顯)이요 자(字)는 여달(汝達)이다. 1587년(丁亥) 9월 24일에 태어났다.진사에 올랐고,광해 폐조(廢朝)에 중형 참봉공(仲兄參 奉公,매포 박동립)으로 더불어붓을떨쳐 상소(上疏)를 초(草)하 여 궁궐에 나아가 상장(上章)으로 항의(抗議)하니 적신(賊臣)유 희분(柳希奮)이바야흐로폐의(廢議)를주장하더니공의항소(抗 疏)함을 듣고 사람으로 하여금 만나기를 요구하여 이해로서 달래 서당중인(黨中人)을삼고자하거늘공이소리를가다듬어꾸짖어 이르기를 븮사람이 신하가 되어 국가로 하여금 윤리와 기강(紀綱) 을 멸(滅)하고 끊기게 하여 장차(將次)불궤(不軌)의 흉모(凶謀) 를 하니 복재간(覆載間)에 한 큰 난신(亂臣)이라븯하고 드디어 소 매를떨쳐일어나대궐로나아가피를뿌리고글을올리니희분(希 奮)이가(可)히위협(威脅)하지못할것을알고 그무리에게 부탁 하여 간사(奸邪)한 백반(百般)의 꾀로 저알(沮 옥 )하여 마침내 이 룸에 오르지 못하니 선생께서 시사(時事)의 가히 어찌할 수 없음 을알고드디어과거의업(業)을폐(廢)하고세상일을사절(謝絶) 하니이에거두어품어물러나임학(林壑)에은거(隱居)하여세상 과함께가고돌아오지아니하니세상에아는이가적었다. 선생이 은거한 계산(溪山)에 청취(淸趣)가 있으니 머뭇거리며 그 자리를 멀리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땅이라.그 수성(水聲)에 청절(淸絶)함을 사랑하여 자호(自號)를 청유당(聽流堂이라 하고 인(因)하여서문(序文)을지어서기(記)를하니이르기를아!물이 여!물이여!어찌 물 함이요 종조(終朝)토록 물에 임(臨)하니 염옹 (濂翁)의탐리(探理)가깊었도다.아득한나소자(小子)는수천재 (數千載)아래 낳아서 배움이 끊어진 쇠(衰)한 끝에 어찌 감히 성 현의 취(取)할 바를 바라리오.비록 간절히 나라를 위하여 진실하 고정성스러워하나도리어어리석고도(道)있는성학에나가고자 하나스스로졸(拙)하니분대이행(履行)하는데편안하여스스로 정정(貞淨)히 한당(閒堂)에 앉아서 흉금(胸襟)이 쇄락(灑落)한 것은이물의흐름이있어서귀에상쾌하고기상(氣像)이활발(活 潑)한 것이 이 물의 흐름이 맑은 회포(懷抱)와 같은 고로 써 호(號) 를하였다. 선생의 성품과학문이이처럼 높아가히 형만한 아우없다하지 만, 1623년(계해) 6월 26일에 질병으로서 마치시니 향년(享年)37 세이기에 애석하다.선생이 절구(絶句)로서 이르기를 「요순의 임 금돕기를원(願)하고공맹(孔孟)의스승쫓기를원(願)하노라.성 인은천년으로멀어졌으니궁(窮)한구렁에서홀로생각에얽히노 라」하여오직충과효를실천한생애이다할것이다. △국담박수춘선생의부조묘 부조묘는 조 선 시대의 신 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받 은 신주를 모 시는 사당이 다. 주로 나라 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이 나, 위험에 빠 진 나라를 구 하기 위해 목 숨을바친사람들이이경우에속한다.왕들은나라에큰공훈을세 운 인물이라 여겨지면 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하였다. 이렇게 ‘불천지위(不遷之位)’가된대상들은4대봉사가끝난후에도신주 를 땅에 묻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후손들에게 기제사를 받게 되었 던것이다. 경남밀양시부북면후사포리에있는국담선생부조묘는1672년 (현종13)에통정대부호조참의에추증되고 영구히사당에위패를 두는것을나라에서허락한부조묘지전(不 튐 廟之典)이내려져선 생이 서거한 음력11월 5일과 부인 월성김씨의 기일 1월 24일에 제 향을올린다. 제향절차는 신주를 모시는 출주고사와 기제사와 같은 제향 후 에는신주를사당으로모시는절차로마무리된다. 박수춘의자는경노(景老),호는국담(菊潭)으로1572년(선조5) 11월 경남 밀양군 부북면 삽포리에서 아버지 동몽교관 무진재(無 盡齎) 박신(朴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국담은 어릴 때부터 충효절의 학덕을 고루 갖춘 명문가 집안에서 성장 하면서 학문을 쌓았다. 1592년 21세 때 임진왜란을 만나 부모 형제와 청송으로 피난하 였으나 1593년 봄 전염병으로 부모와 형제자매 5인 등 모두 7명을 한꺼번에 잃은 국담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그의 국 담추선록에적고있다.국담은그때나와누이동생만이천신만고 끝에 살아남고 일곱 시신을 차례로 묻었지만 난리 중이라 장례절 차마저갖출수가없어“하늘에사무치는원통함이여!땅이꺼지는 슬픔이여!내일백번고쳐죽어도이일만은잊을수가없구나!”하 고통곡했다. 1597년 국담은밀양으로돌아오면서장례경비를마련하여반장 (返葬)을 완수하였다. 이 해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국담은 피란 후 옮겨간청도에서의병을 일으켜 의병장곽재우와함께 창녕화 왕산성에서 왜적을 토벌하면서 산성을 고수했다.국담은 적도(賊 徒)의토벌을마음에다져부끄러움을씻으려는계획을세웠다.무 리를모으고의병을합하여감히권왕(勸王)의뜻을펴려했다.군 문을 향하여 적개심을 돋우고 우서(羽書)를 날려 뜻을 전한다는 것으로시작되는창의격(倡義檄)을남기기도했다. 국담 선생은 1599년 월성 김씨 교관 김우용의 딸과 혼인을 하고 경북 대구부 남산에 복거(卜居)하고 병자호란 후 경북 청도 풍각 현에 은거하면서 도학자로서 삶을 살다가 1652년(효종3) 11월 81 세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밀양과 대구부의 사림부터 야로(野老) 와 산승(山僧)까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며 장례에 참석한 자가 4,5군(郡)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1672년 (현종13)에 통정대부호조참의에 추증되고 영구히 사당에 위패를 두는 것을 나라에서허락한부조묘지전(不 튐 廟之典)이내려졌다. 1. 궤포의(掛脯儀) -제향일(祭享日)을 앞두고 제향 전 15 일에서 30일 택일 (擇日)하여 임원회 의를소집하여제례 에대한준비사항을 점검하고각문중에 헌관 추천 및 제례 절차 발송(享禮日 통지) 2.시도기-시도기(時到記)는참제원의인적사항을기록하고후 일제관분정에이용하기도한다. 3.제집사의분정(分定)①초헌관,아헌관,종헌관,집례,축관등5 집사는각 지파 소문중에서 추천을 받고,집사분정을위한개좌는 입제일(入祭日) 저녁 또는 제향일(祭享日) 아침에 종회장(宗會 長) 이하 모든 참제원이 모인자리에서 유사가 “개좌(開座) 아뢰 오.”를세번연창하고상읍(相揖),평신(平身)후시작한다. ②3조5공(三曹五公)의 선 출 △ 조사(曹司) 선출 - 참제 원의추천을받아서원의서기 격인 ‘조사’ 3인을 선출(종회 장이추천하고참제원의동의 를받기도한다) △공사원(公事員)5인 선출 :조사가 협의하여 선출한다.인사 를 다루는 공사원은 대개 원임(院任)의 유사 가운데 모든 사람들 이추복(推服:추앙하여복종함)할수있는사람들로구성되는데, 일종의원로원회의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조사·공사원은반드시 홀수로선출한다.) △제집사(諸執事)선정 :조사,공사원 이 재임실(齋任室)에 별도로 모여 숙의 끝에5집사및제집사(諸執事)를추대(推 戴)한다. 5집사는 회의 시간 단축을 위하 여 종회장 이하 소임이 참석하여 사전에 협의하기도한다. △ 5집사는 망권(望圈) 또는 천권(薦 圈)을작성하여회람하고천권록(薦圈錄)에기재(記載)한다. △직일(直日:기록을맡은집사로분정은하지않음)의선정:직 일이정해지면“直日ooo”라고쓴후기둥에붙인다. △ 집사정기(執事定記 또는 執事定榜記)는 축(祝)이 정서(精 書)하여게시(揭示)하고예(禮)가창방(唱榜)한다. △ 유사가 상읍(相揖) 후 “파좌(罷座) 아뢰오.”를 세 번 연창하 고회의를마친다. 4.사축-제집사(諸執事)의분정(分定)이끝나면축(祝)이사축 (寫祝), 축이 사축 불가시 직일(直日)이 사축(寫祝)한다.(사축은 주로당일새벽에한다.) 제수는 총무를 비롯한 집행부에서 위임 또는 직접 시장을 보아 준비를 마쳤으나 최근에는 전문업체에 의뢰하여 납품 받아 유사 (有司, 총무)와 장찬(掌饌)이 전사청(典祀廳)에서 제기(祭器)와 제수(祭需)의정결(精 潔)을 미리 간검(看 儉)한다. △ 진설 - 장찬(掌 饌)과 진설(陳設)은 예복(禮服)으로 전사 청(典祀廳)의 제수(祭 需)를봉송(奉送)하여 진설을마친다. △천권교부-제향일 아침 대종회장이 소임을 맡은 제관에게 작 성된 천권을 교부한다.이때에는 관세위를 준비하여 손을 씻고 서 로마주보고꿇어앉아읍을하고전달한다. △집사분정기(執事分定記)는 향례 하는 장소 앞에 게시(揭示) 하고,제집사(諸執事)는 행사에 필요한제반사항(諸般事項)을 준 비및확인하여행사에차질이없도록한다. △집례(執禮)의창홀(唱笏)에따라진행한다. △ 집사정기(執事定記 또는 執事定榜記)는 집례(執禮)가 창방 (唱榜)한다. △ 알자와 찬인은 현관 인도 시(引導時) 헌관의 왼쪽에 나아가 읍한후헌관의왼쪽반보앞에서인도하고복위(復位)후헌관에 게읍을하고자기위치로간다. △ 집례(執禮)가 ‘謁者詣初獻官之左白謹具請行事(알자 예 초 헌관 지좌백근구청행사)’라고 창홀하면 알자는초헌관의왼쪽 에나아가읍을한후“請行事(청행사)”를세번연창한다.이때초 헌관은읍하고“行事(행사)”라고答한다. ※행산공과 두 아드님의 각 단소에 제관이 들어서고 축은 행산 공을시작으로차례대로독축한다. △ 집례(執禮)가 ‘謁者詣初獻官之左白禮畢(알자 예 초헌관 지 좌 백 예필)’이라고 창홀 하면 알자는 초헌관의 왼쪽에 나아가 읍 을 한 후 “禮畢(예필)”이라 세 번 연창한다.초헌관은읍하고“禮畢 (예필)”라고答한다. 비가내려 단소에서 제향을올리지못할경우재실에 제단을마 련하고 ‘거하우재중제향(遽下雨齋中祭享), 갑자기 비가 내려 재 중(齋中)에서 제향(祭享) 하리라.’라는 문구를 써 벽에 붙이고 단 소에서지내는절차에같이진행한다. 밀성박씨행산공파 행산재(杏山齋) 행산재(杏山齋븡경남밀양시부북면송학길20)전경.후원에삼부자단소가있다 행산공파지파서원과부조묘 노양서원전경 청하서원전경 청하서원진설,4변4두를놓는다 청하서원축문 뱚▲매포박동립선생 뱚▲청류당박동현선생 신주봉안, 사당에서신주를모시고대청에마련된 재상 영위(靈位)에모신다.진설을기제사와같다. 뱚▲국담박수춘선생 행산재제향 제례준비 개좌광경 제수준비 행사준비 행사 제향광경 우천시제향 우천시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