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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중문면 라이악과 우보악이 잘 관측되는 토벌작전의 요충지였다. 1950년에 경찰에 지원 한 김창근(납읍리, 남, 2004년 78세)은 3년 간 토벌활동에 참가했다. 알오름 주 둔소에도 있었다는 그는 알오름 주둔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부대장은 장석권(관)이었다. 100사령부 산하 103부대는 전투경찰대였다. 중문 위 녹하지 주둔소에 주둔했다. 그때부터 3년을 토벌 다녔다. 계속 주둔소에서 살면서 내 려오지 못했다. 산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먹는 것은 다 보급을 해줬다. 100사령부는 서 귀포에 있었다. 거기서 다 보급을 해줬다. 100사령관은 총경이었다. 그는 우리가 산사 람과 똑같이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산사람하고 같이 행동해야 산사람을 잡을 수 있 다는 것이었다. 위장 문제가 아니라 그런 정신 상태로 일하라는 것이었다. 100사령부 보급에는 주민들이 동원됐다. 짐을 지어 나르는 것은 일반 주민들 몫이었다. 군인은… 한 번 와서 우리와 같이 작전을 했다. 그때, 제주산 토벌이 지리산보다 어렵다는 말을 했었다. 제주산은 가시덤불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다. 3년 간 토벌을 다니 면서 폭도를 생포하기도 했지만 우리도 동료를 많이 잃었다. 신경사라고, 광령 사람이 었는데 희생당했다.” 그는 이어 100사령부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다. “100사령부 내의 100부대는 서귀포 주둔, 101부대는 성읍(정의 쪽), 102부대는 성 산포, 103부대는 녹하지에 주둔했다. 105부대는 다래오름에 주둔했었다. 우리는 합동 작전을 벌였다. 서로 교차해서 만나는 작전으로 폭도를 잡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오름 에서) 내려올 때 폭도가 한 5명 정도 남았을 것이다. 그 정도 됐을 때 철수를 했다. 나는 그 이후 쭉 경찰에 근무했다. 103부대는 모두 제주 출신 경찰들이었다. 처음에는 전투 경찰로 많이 뽑았다. 그 이후에 의용경찰을 뽑기도 했다. 봉급은 적었다. 가족에게 식량 만 줬다. 나는 입산해서 3년을 그냥 산에서 살았다. 집에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었다.” 1950년대 초반, 잔여 무장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토벌활동에 참가한 경찰들 은 산 속을 헤매며 숨막히는 생활을 했다. 당시 경찰의 몸에는 이가 북적였고, 쾌 쾌한 냄새 때문에 경찰과 무장대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토벌활동 후 경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