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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평생을 나라사랑의 一念으로 살다간 偉人이 있었으니 그 이름 千秋萬世에 빛날 愛國志士 沃坡李鍾一선생이다.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이곳 원북면 반계리 89번지에서 星州李氏 高士 敎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호를 沃坡 黙菴 이라했고 天然子中皐山人玉泉子中軒三一子등은 선생의 筆名이다. 沃坡는일찌기 총명한 재질과 뛰어난 學究力으로 漢學에 專念하더니 이미 16세에 文科에 급제 하였다. 그후 1882년 修信使 朴泳孝와 함께 사절단의 一員으로 日本을 다녀와 그곳의 開化된 文物을 接하고 느낀바 있었으니 이때부터 선생의 가슴속에는 開化의 意志가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후 官이 正三品中樞院議官이 되었으니 쇠퇴기의 國運을 통탄하며 취임 十여개월만에 官職을 물러나 救國運動에 헌신하였다가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위해서는 우선 민중계몽과 인재양성이 중요함을 느끼고 신문발행과 교육사업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興和學校와 國文學校설립을 비롯하여 1894년 普成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한 후 경향의 7개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忠愛에 둔 敎育目標로 後進養成에 盡力하였다. 國文硏究所硏究위원으로 한글 발전에 至大한 공헌을 한 선생은 189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로 편집된 帝國新聞을 創刊하고 社長에 취임하여 10여년동안 민중계몽과 개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나 日帝에 依해 강제폐간되었다. 1908년 선생은 大韓皇城新聞社長에 피임되어 日帝의 온갖 회유와 강압에도 屈하지않고 濟世救民의 精神으로 言論活動을 展開시켰다. 선생은 正論直筆의 해박한 論說로 警鍾一世의 본보기가 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군사 종교 여성 등 筆力이 미치지않는 곳이 없었다. 선생의 活動은 日帝관헌의 속박과 감시로 수차례에 걸쳐 피검되었으나 조금도 屈하지않고 大韓協會自强會國文硏究會등의 救國단체를 조직하여 會長등을 역임하였고 한편으론 孫秉熙와 함께 나라를 걱정하면서 天道敎에 入校하여 敎會日報를 通하여 救國의 宗敎思想을 펼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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沃坡李鍾一先生生事蹟碑(옥파 이종일선생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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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요즈음 새마을정신운동과 같은 新村精神運動을 제창 우리의 정신을 개조하여 구습을 타파하고 근면 노력하면 잘 살수있다고 역설하였다. 이같은 선생의 선구자적 애국 애족의 정신은 결국 1919년 2월 어느날 吳世昌 權東鎭 崔麟 등으로 부터 三一運動의 계획을 듣고 그 자리에서 民族代表로서 獨立宣言書에 署名할것을 승락하고 독립선언서 원고를 스스로 조판 교정 인쇄하여 國內外에 배포하였다. 己未年三月一日 民族代表 33人의 한사람으로 泰和館에서 獨立宣言式을 거행하고 日憲에게 체포되어 3년의 獄苦를 치루다 일제의 잔인한 고문으로 인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出獄하니 외아들 學淳마저 호열자 疾으로 사망한 뒤였다. 출옥후 3년간 韓國獨立運動史를 집필하여 처음 발행한 三券을 吳世昌 權東鎭에게 한권씩 전하였으나 日警에게 압수당하고 말았다. 이와같이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一生을 몸바친 선생은 1925년 8월 31일 祖國光復을 보지못하는 恨을 품은채 서거하니 묘소는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동작동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民族主義思想의 확립과 自强富國을 이룩하자는 實學으로 출발한 선생의 思想은 愛國愛族의 救國精神과 獨立運動으로 승화되어 타올랐으니 어찌 몇자의 글로 그 表現을 다하리오. 그러나 先生의 高貴한 삶을 永遠히 기리려는 뜻으로 돌에 새겨 後生의 귀감이 되게하고져 할 따름이다. 1987년 12월 일 저절로 朴春錫 짓고 長巖 李坤淳 쓰고 瑞山郡守 孔秉善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