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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개관 177 8・15해방이 되면서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졌지 만 남한의 전력은 일제 때와 같이 전력 부족분을 북한 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신경질적인 송전으로 1946년 4월부 터 동년 9월까지 공급전력을 47,000㎾로 제한하는 등 남한의 전력사정은 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 었다. 미군정 당국은 이러한 전력사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 동안 운휴 중에 있던 영월, 당인리, 부산 등 각 화 력발전소를 응급 수리하여 1946년 12월부터 발전을 개시하는 동시에 한미협정에 따라 1948년 2월 부산 에 설비용량 2만㎾인 Jacona호와 동년 5월 인천에 설 비용량 6,900㎾인 Electra호의 두 발전함 도입 등 긴 급조치로 1948년 4월에는 103,783㎾의 전력을 확보하 였다. 이처럼 필요한 전력을 가까스로 확보해가던 1948 년 5월 14일 북한이 일방적으로 전기공급을 중단하여 남한은 극심한 전력난을 겪게 되었다. 더욱이 2년 후 6・25사변으로 전력설비가 엄청나게 파괴됨으로써 전 력난은 더욱 가중되었다. 다급한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1950년 11월부터 1951년 2월 사이에 미국으로부터 마쉬(Marsh)호 등 4 척의 발전선을 들여와 마산, 목포, 장생포에서 발전을 개시하였으며, 1951년 6월 27일에는 대형 발전함 임피 던스(Impedance)호가 내한하여 부산항에서 발전을 개시함으로써 전력사정이 다소 완화되었다. 이 발전함들은 1955년 9월 22일까지 우리나라에서 운영되었다. 1953년 7월의 휴전을 전후하여 전기회사 들은 영월화력, 운암수력, 청평수력, 당인리화력, 화천 수력을 긴급 복구를 하였다. 특히 38선 이북에 있던 화천수력의 54,000㎾를 추가하여 최대 12만㎾의 전력 을 유지함으로써 전력난이 다소 완화되었다. 1953년 12월 23일 정부 각 부처를 망라하여 구성한 “ 전원개발위원회 ” 는 제1차 전원개발 3개년 계획을 수 립하고 FOA의 원조를 받아 당인리화력 3호기(25,000 ㎾), 마산화력 1,2호기(50,000㎾), 삼척화력(25,000㎾), 괴산수력(3,000㎾) 등을 건설함으로써 수요전력을 어 느 정도 충족할 수 있게 되었다. 다. 6・25사변 시 전력시설물 피해 6・25사변이 발발하고 국군과 UN군이 북진하여 평 양을 수복하기 전에 상공부는 북한산업조사단을 북 한에 (상공부 전기국 이태준, 조선전업(주) 김흥식, 경 성전기(주) 윤재신) 1950년 10월 10일부터 1950년 12 월 7일까지 파견하였다. 그 조사결과로 파괴된 주요 전기시설 현황은 부전강 제1발전소, 장진강 제1발전소 와 이북에 있는 흥남, 청진, 본궁, 성진, 용흥, 이호지, 진남포, 평양 제1・제2길주변전소의 변압기 등이 파손 되어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 어린이 역살 사고로 격분한 군중의 습격을 받아 소각된 전차의 잔해 본문1편 _ 132185(ok).indd 177 2014-01-24 오후 6:2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