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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순 (당시26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6년 9월 12일 경기도 출생 1985년 3월 서울 영등포고등학교 졸업 1985년 3월 한신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7년 노동운동 투신, 수원지역에서 공장활동 함 1989년 5월 20일 수원 검찰청 검거농성, ‘폭력 공무집행방해’등으로 구속, 1년 6월 복역 함 1990년 11월 13일 부산교도소 출소, 이후 노동운동을 계속 함 1991년 병무청 영장수취 거부로 주민등록 말소, 기무사의 추적을 받음 1992년 수원, 부천 등지에서 노동운동 1992년 8월 29일 직장 퇴근 후 귀가 중 행방불명 됨 |35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노태우정권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이미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사회과학서적들을 탐독하여 기초적인 사 회인식이 되어 있었고, ’85년 3월 한신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후 재학 중 반독 재 민주화운동, 노동자 권익을 위한 민중운동을 지향하는 언더 써클에 가입하여 ’85년 5월 한신대학생회에서 주도한 교문 밖 진출시위, ’86년 6월 광주민주화운 동관련 한신대 학생시위 등에 참가하였다. ’86년 12월 노동운동을 준비하는 지하 써클(일명F3)에서 활동하였고, 수원지역 노동운동 지하조직(일명 복씨조직)에 함 께하였으며, 영세사업장에 위장 취업하여 임금인상 등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노 동현장 활동을 하였다. ’89년 5월 20일 수원지검 점거농성으로 인해 징역 1년 6 월의 형을 선고받고, 출감 후 ’91년 2월 19일 군 입대 영장의 수취를 거부하고(’92 년에도 입영거부), 소규모 영세사업장에 다시 위장취업을 하였다. 그러나, 신분 제약으로 인해 노조 설립 등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고 병역기피와 비합법 조직 운동으로 공안기관의 미행, 감시를 심하게 받게 되었다. 공안기관에 의해 추적당 하던 중 ’92년 8월 29일 부천시 수영기계에서 퇴근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오랜기 간 가족들은 행방을 찾아 수소문 하였다. ’01년 2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 동지는 ’92년 8월 29일 당시 시흥역내 열차사고 사망자의 지문과 동일인으로 확인되었다. 무단횡단을 하다 열차에 충돌하여 두부파열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고사로, ’92년 10월 8일 ‘지문불발견’으로 행려사망자로 처리되어 있었다. 또한 조사과정에서 당시 기무 사에서 일명‘마파람 사업’을 실시하여 군내 학생운동 전력자들의 동향을 관찰하 였는데 점거농성을 함께했던 이모씨에 대해서도 내사를 하던 중이라는 것이 밝 혀졌다. ’91년 11월 7일 기무사 요원이 동료에게“박태순은 어디 있느냐”면서 행 방을 추궁한 바 있으며, 수원경찰서가 동지의 활동조직인‘복씨조직’의 동향을 파악해 오는 등 동지와 관련된 조직에 대해 내사를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동지의 시신은 신원불명의 변사자로 분류되어 가매장된 후 용미리 무연고자 납 골당에 안치되어 있다가 ’02년 마석모란공원민주열사묘역으로다시 안장되었다. 끝내살리라 |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