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page
제1편 개관 173 적인 문제로 인하여 매각에 쉽게 응하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은 끝내 통감부의 힘을 빌려 그 매수를 꾀 하게 되자 한미전기로서는 가중되는 운영난도 겹쳐 어 쩔 수 없이 1909년 6월 24일 한미전기의 부채와 함께 권리일체를 한일와사주식회사에 인계하고 말았다. 이후 36년 동안 한국의 전력사업을 일본사람들이 독점하게 되었다. 한미전기를 흡수한 한일와사주식회 사는 1909년 7월 27일 상호를 한국와사전기주식회사 로 개칭하는 한편, 1911년 8월에는 자본금을 두 배로 증자하고 지방까지 사업을 확장하다가 1915년 9월 16 일에는 회사이름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개칭함으로써 “ 경전시대 ” 가 등장하게 되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시의 호경 기를 타고 일본자본의 한국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전력수요도 증가하였다.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전기사 업 이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앞을 다투어 전기사업체 를 설립함으로써 1911년부터 1920년까지 24개의 전기 사업체가 영업을 개시하게 되었다. 1911년에는 대전전기(주), 평양전기(주), 대구전기(주), 진남포전기(주), 목포전등(주), 군산전기(주), 조선전기 (주), 1912년에는 신의주전기(주), 원산수력전기(주), 1913년에는 수원전기(주), 1916년에는 함흥전기(주), 중 외전기(주) 전주지점, 광주전기(주), 1917년에는 개성전 기(주) 한국인 설립, 통영전기(주), 진주전기(주), 1919년 에는 회령전기(주), 조선전기흥업(주), 해주전기(주), 여 수전기(주), 강원전기(주), 금강산전기철도(주), 1920년 에는 겸이포면영전기(주), 공주전기(주)가 각각 영업을 개시하였다. 2. 개성전기회사(민족자본) 설립 경기도 개성에서는 김정호(金正浩)를 비롯한 12명 의 유지들이 자본금 5만원을 출자하여 1917년 1월 19일 전기사업허가를 받고 4월14일 개성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개성전기(주)는 일본자본이 우리나라의 전기사업을 독점하던 시대에 유일하게 순수한 민족자 본으로 설립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책임자도 우리나라 사람인 윤일중(尹日重, 협회 초대회장)을 전기주임기술자로 선임하였다. 일본의 산요전기에서 사용하던 영국제 디젤엔진발 전기(출력 150㎾)를 구입하여 회사설립 이듬해인 1918 년 4월 1일 개업한 개성전기는 1,500등을 점등하면 수 지계산이 맞는 계획이었으나 개업 2년 후 3,000등을 점등하여 성공적인 사업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919년 12월 30일 디젤엔진의 크랭크샤프트 가 부러져 수리하는 23일 동안 전기 공급이 중단되었 고 수리한 후에도 거의 격일제로 고장이 연속되는 어 려움을 겪기도 했다. 1923년 출력 200㎾짜리 유니 프 로의 신품 엔진발전기로 대체하여 발전능력이 커지면 서 인근의 장단과 문산 부근으로 전기 공급범위를 확 장하여 27,000등을 점등하는 큰 사업으로 번창하였으 며, 주주들에 게는 경기가 나쁠 때에도 최하 10%이상 의 이익배당을 하는 성실한 운영체제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운영되던 개성전기(주)는 1936년 11월 평안 남북도와 황해도 전체의 배전사업을 장악한 서선합동 전기(주)에 합병되면서 전기사업의 유일한 민족자본운 영을 끝내게 되었다 본문1편 _ 132185(ok).indd 173 2014-01-24 오후 6:2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