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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한국전력기술인협회 50년사 사의 설립과 서울시내의 전차, 전등, 전화사업의 시설 및 운영을 상공부에 신청, 같은 해 1월 26일자로 허가 를 받았다. 지금까지 국내의 모든 역사서들은 처음부 터 고종과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 등의 공동기업 으로 성립된 것처럼 와전되어 왔다. 형식상 당시의 한성부 판윤 이채연(李采淵)이 사장 이 된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10월 17일에 기공한 서 대문 ~ 홍릉(청량리, 민비의 능)간의 6마일 거리에 단 선궤도 부설과 전선로 가설공사를 착공, 같은 해 12 월 25일에 완공하는 한편, 동대문에 직류 600V, 75㎾ 1대, 100마력의 증기발전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전향식(轉向式) 개방전차 8대와 황제승용전 차 1대를 조립하여 1899년 5월 17일 성대한 개통식 을 거행하였다. 이날은 음력 4월 초파일이라 관등(觀 燈)의 대제일(大祭日)을 택한 것인데 귀족, 문무관, 각 국 공사, 영사 및 영사관원, 그밖에 각계의 유지 다수 를 초청하여 화려하게 장식된 8대의 전차에 분승하여 종로거리를 동서로 질주케 하자 시민의 환희는 충천하 였고, 호기심에 가득 찬 시민들의 운집으로 그 운행이 중지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개통후의 전차는 연일 초만원이라는 대성황을 이루 었는데 당일에는 몰려드는 시민들과의 사고를 막기 위 하여 병정 300명과 순검(巡檢 : 경찰) 250여명이 동원 되었다. 한성전기는 1899년 중에 전차선로를 종로에 서 남대문으로 연장하고, 다음해인 1900년에는 다시 남대문에서 용산(원효로)까지 연장할 것을 결정하여 1901년 1월경 준공하였다. 한편, 1900년 4월에는 전차 6대와 화차 2대를 새로 만드는 한편 동대문발전소에 125㎾의 직류・교류 겸용 발전기를 증설하여 총 발전용량 200㎾를 확보함으로 써 전등 사업에 대비하였다. 한성전기회사는 설립 후 해마다 사업을 무리하게 확대하여 자금이 부족하게 되었다. 동 회사는 부득이 미국의 신탁회사로부터 저리자금 을 차입하기로 결정하고 고종의 양해를 얻어 북미합중 국 코네티컷주 세이부르크시의 엠파이어 트러스트회 사(Empire Trust Co.)와 교섭을 개시하였다. 한성전기 는 일체의 재산을 담보로 100만 달러 한도의 차입을 계약하기로 하고, 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한성전기 를 세이부르크시 디크리바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1904년 회사명을 한미전기회사(American Korean Electric Co.)로 개칭하여 밀즈(Mills)가 사장 이 되었으나 이는 형식적이고 실질적인 사장과 부사장 은 콜브란과 보스트위크가 각각 맡아 집행하였다. 또 한 우리나라 고종 황제의 출자는 단순한 투자에 그치 게 되었으며 회사는 코네티컷주법의 지배를 받게 되 었다. 그리고 영업권의 관계상 고종 황제와의 계약을 1904년 2월 19일 다시 체결하였다. 일본은 1901년 9월 부산에 부산전등주식회사를 설 립하여 전기사업을 시작했으며 노일전쟁(1904 ~ 1905) 에서 승리한 후 한국의 모든 분야를 잠식하고 있었다. 일본인은 1907년 9월 23일 한일와사(瓦斯 : 가스)주 식회사를 설립하고 당시 서울시내의 전등, 전차, 전화 통사업을 독점하기 위하여 개인・단체 또는 관청을 동 원하여 한미전기회사의 매각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한 미전기회사는 단순히 경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 본문1편 _ 132185(ok).indd 172 2014-01-24 오후 6:2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