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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시 오등리가 얼마나 토벌대에 주목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 후 오등리 청년들은 다른 마을에 비하면 아주 이른 시기부터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던 6월 초순 경, 11연대에 배속된 9연대 1대대가 죽성 설새미에 주둔했다. 주민들은 더욱 힘 든 상황에 빠져들게 됐다. 1948년 12월 13일,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벌여 오등리 전체 가옥을 불태웠 다. 마을 주변을 떠돌던 일부 주민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고, 다른 주 민들은 피난길에 올라 도남리에서 소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도남리도 오래 가지 않았다. 곧 군인들은 도남리도 불태웠다. 오등리 주민들의 희생도 이어졌다. 1949년 1월 3일, 도남리가 초토화되던 날 오등리 주민 몇 사람이 도남주민들과 함께 학살됐다. 그리고 며칠 후인 1월 8일, 전인택 등 5명은 주정공장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용담리 도령마루로 끌려가 총살 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용담동의 닥그내 공회당과 정뜨르 공회당에 수용됐다. 그 후 수용소에서 겨울을 난 사람들은 봄이 되자 도남이나 광양, 남문통 일대로 연고지를 찾아 흩어졌다. 오등리 마을 재건은 1951년에 시작됐다. 처음에는 오드싱을 중심으로 성을 쌓 아 재건하면서 죽성과 고다시 주민들도 이곳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그러다 몇 년 후 고다시마을도 재건됐다. 그러나 죽성의 작은 자연마을들인 큰동네, 새가름, 새 장밧, 큰담밧, 민밧, 선들목 같은 마을은 아직도 재건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오등리 주민들이 학살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1948년 4월 23일: 허인(40, 여)은 구장이었던 남편을 찾아 자택을 습격한 무장대 에게 살해됨 5월 8일: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강상노 일가족 등 10여 명을 학살 함. 강상노(31, 남, 이명 강상배)는 어승생 골머리로 끌려가 살 해됨 11월 14일: 강재현 등 3명이 설새미 군주둔소에서 총살됨 (오등리-주둔지 -설새미 군주둔소 옛터, 참조) 1949년 1월 2일: 김영하(68, 남) 등 4명이 도남리에서 소개생활을 하던 중 토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