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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월 초부터 중문국민학교에 군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했고, 중문지서는 기존 제주 출신 경찰 외에 응원경찰로 인원을 대폭 보강했다. 당시 중문에 주둔한 군과 경찰 의 핵심 요원은 서북청년회 단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군과 경찰이 주둔한 다른 지역은 4·3 기간 피해를 덜 입었는데 반해 중문에서는 1948년 11월 이후 토벌대 의 초토화작전이 시행되는 동안 중문 주민은 물론 그외 관내 주민들이 많은 피해 를 입었다. 중문리에서는 4·3 이전에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 많았다.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12월 12일, 중문에서는 미군의 발포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날 주민 수백 명이 당시 윤 면장 집을 찾아갔다. 주민들은 윤 면장이 일제강점 기에 공출받아 마당에 쌓아둔 보리쌀을 내놓으라 요구하다 윤 면장을 구타하게 됐다. 이에 현장에 출동했던 미군이 발포했고, 이 총탄에 김행오(37, 남, 상예리) 가 사망하고 강상효(하원리)가 중상을 입었다. 1947년 3월 17일에는 3·1발포사건으로 파생된 3·10총파업에 중문지서 경찰 까지 동참하자 응원경찰이 중문지서에 배치돼 지역유지들을 총파업 관계자라며 무작정 체포했다. 곧 주민 1천여 명이 지서 앞에 모였고, 이들은 체포된 주민을 석 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경찰은 주민들에게 즉각 발포했다. 이 사건으로 주민 8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중 강상준(19, 남, 상예리)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3 월 23일 사망했다. 그 후 4·3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중문리 첫 4·3희생자는 당시 서귀중학교 학생이었던 이승남(20, 남)이었다. 그는 학교가 휴 교하고 난 뒤인 4월 20일 학교에 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서귀포경찰서로 연행된 뒤 4월 24일 서홍리에서 총살됐다. 무장대에 의한 첫 희생자는 박신문(36, 남, 이 명 박명원)이었다. 그는 중문지서 협조원으로 전화선을 확인하기 위해 순찰을 돌 던 중 무장대의 기습을 받고 사망했다. 이외 주요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8년 11월 5일: 무장대가 중문리를 습격해 면사무소와 중문중학원, 주변 민가 30여 채를 불태움. 그때 무장대로부터 중문지서를 지키고 있던 김호석(23, 남)과 김남군(24, 남, 제주읍 삼도리), 김권석(28, 남, 성산면 신천리)이 사망하고 김재환(23, 남, 제주읍 이도리)이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