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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金泳濬/19회, 1941.12.15.~1960.3.18.)
평북 신의주에서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여섯 살 되던 1946년에 가족과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았다. 육군 대위이던 큰형님이 여순사건과 관련된 지리산 공비토벌 때 전사하고(1949년 10월) 아버지마져 1950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6.25전쟁때 다시 마산으로 이사 와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게 되었다.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월영초등학교(9회)와 마산중학교(6회)를 졸업한뒤 1957년 마산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의거 며칠 전에 고교 졸업식을 마친 상태였다. 뛰어난 머리, 선량하고 내성적인 성품의 그가 3.15의거에 뛰어들 것으로 예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공도 또는 체신대 진학을 원했던 꿈 많은 청년 학도의 마음에는 언제나 정의감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1960년 3월 15일 해질 무렵 의거에 동참하여, 그날 밤 장군동 다리 근처에서 경찰의 총탄에 하복부 관통상을 입고 도립마산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워낙 열악한 병원 환경과 경찰의 수술 방해 등으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안타깝게도 사흘 뒤 운명하고 말았다. 5년만 더 기다리면 엄마를 비행기에 태워준다던 약속과 청운의 꿈은 허공의 메아리가 되었지만, 열아홉의 끓는 피는 마침내 이 나라 민주발전에 거룩한 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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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실(金涌實/21회, 1943.12.17.~1960.3.15)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성호초등학교(48회)와 마산중학교(8회)를 거쳐 1959년 마산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8남매의 셋째이자 아들로서는 맏이였다. 명랑하며 착실.온건한 성품과 우수한 두뇌, 탁월한 지휘력을 가진 1학년 B반 급장이었다.
1060년 3월 초, 자유당 정권의 부정.불법에 항의하는 마산고 학생 데모 모의를 주도하였으나 데모는 불발하였다. 3월 15일 선거 당일 할머니의 투표권을 누군가가 사전에 행사한 사실을 확인하고 크게 분노하였다. 비장한 결심을 하고 친.인척 집을 들러 일일이 작별인사를 한 뒤 저녁 7시 의거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날 밤 10시 무렵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경찰이 쏜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여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경찰은 시신이 된 그의 주머니에 '인민공화국만세'와 같은 불온 빠라를 넣고 그를 빨갱이로 몰아 사건을 왜곡하려 하였다. 그러나 양심적인 검사, 올곧은 병원장, 정의로운 간호사들에 의해 불순한 의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흉탄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나라를 이끌어 갈 동량지재로 성장했을 그는 산화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든든한 기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