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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東뿔) . 만와(硬뭄시 공은 밀성대군의 후예로 13  대조 행산공(否山公)은 양효공(良孝公) 간(幹)의 자차  (次子)로서 은산부원군 휘 영균의 동생으로 고려 충혜  왕 때 (1340년경) 태어나고 휘(譯)는 세균(世均)으로  고려조의 보문각 태학사이며 전문형(典文衝,정2품)과  중국 元나라에서 한림학사(輪林學士)를 지내고 귀국하  여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밀성부원군(密城  1741 년 밀성 대군의 후손을 모두 실은  최초의 대동보 신유(辛맴) 보(諸)  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說號)는 충정(忠靖)이다.  아들 도은공(挑隱公 휘 文秘)과 소감공(少  藍公, 휘 文翊) 형제는  포은(정몽주) , 목은(이색)등의  문인들과교류하는등높은학덕으로목은  선  생의 시(詩)에도 전해지듯 당대의 거유(:ê1需)이고 행산공의 삼부자를 가전삼학사(家傳三學土)라  칭하고,  공민왕이 하사한  광효(光孝)  두 글자는  효(孝)의  가문임을 엿볼 수 있다.  고조부의 휘는 수춘(壽春) , 자는 경로(景老) , 호는 국담(짧澤)이다. 국담 선생의 삶은 충(忠) , 효  (孝) 인(仁)  예까豊)를 친행(親行)한 생애(生混)라 하겠다.  정유재란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켜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고수(固守)하  였고,  팡해가 인목대비(仁積大멍)를 서궁(西宮)에 유폐(~廢)시켰을 때 간선배의 기세가 하늘에 닿  았으며 명유(名{需)들이 쫓겨나고 온 조야(朝野)가 진동(震動)해도 이에 대해 말하는 이가 없으니  선생은 홀로 소를 지어 대궐에 나가 극언(極言)하고 간신배들의 죄상을 역설하였다  因子年 청나라에 의해 서울이 함락되자 의병을 일으켜 北上중에 인조가 삼전도(三田週)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선생은 침식을  잊은채 (入山납作몇禮士處世養寫因子民 산에 들어가숭정사되려한다 병자년 백성으로세상사  는 게 부끄럽다네 .)라는 시로서 분통과 충절을 표출하였으며 그 후로는 세상사와 단절하고 산중에  서 학문을닦고 강론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만전념하는등 일신(-身)과집안의 위험을무릅쓰  고오직 의(義)를위해 헌신한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효성에 지극하였고 뭇사람들에 대한 교화(敎化)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 만아니라  성리학의학자였다.  1625년(효종3) 11월 8일에 81세를 일기로  고종(考終)하니 사림(士林)들의  애통함이  친상(親喪)  을 당하듯 하였으며 야노산승(野老山增) 까지도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한다  증조  휘 뢰(爛)는  좌승지를  증직  받았고 조부는  휘 진공(振~m이며 아버지는  휘 성정(聖徵)으로  호(號)는 시재(著第)이다. 연륜이 높아 가선대부 동중추부사에 가자되었고 어머니는 정부인 광산  이씨이다.  양(兩)  형제분의 탁월한 숭조심과 형제애 그리고 고운 심성은 선조의 충과 효 그라고  절의  정신  에서 비롯된듯하다.  l‘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