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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제주읍 음서당(文陰書堂)이 세워지자 도내 각처에서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수학했다. 어우눌은 1949년 1월초 군경의 초토화작전으로 잿더미가 됐다. 주민들 중 일 부는 해안마을로 소개갔으나 대다수는 인근 야산에 숨어 목숨을 이어갔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3월 즈음, ‘귀순하면 목숨은 살려준다’는 귀순권고 삐라를 보고 산 을 내려왔다. 4·3으로 어우눌 주민은 모두 13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연미마을은 복구돼 주민들이 돌아와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미마을에 속 한 작은 마을 어우눌은 끝내 복구되지 못했다. 이곳 출신 이규집(1938년생, 남)이 증언했다. “마을이 불에 타자 우리 가족은 사평마을로 내려가 살았다. 어느 날 경찰이 아버지(이순성)를 잡아갔다. 그날 같 이 잡혀갔던 이순두는 나중에 석방돼 돌아왔다. 그분이 아버지는 음력 1월 5일날 이름이 불려서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해주었다. 어머니(박중아)는 아버 지 시신이라도 찾아보려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병이 나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옷에 혼만 불러 합장했다.” 다. 현황 어우눌 옛터는 대부분 과수원으로 조성돼 마을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잃어버린 마을 어우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