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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와 기독교대한감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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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는 영국 성공회 사제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신앙부흥운동으로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창설된 개신교의 한 교파입니다. 웨슬리는 18세기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국민들의 처참한 상황속에서도 노동 현장을 찾아 그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 였습니다. 이러한 웨슬리의 교회 밖 설교와 활동에 대해 영국 성공회는 설교는 교회안 에서만 할 것을 권유하였는데 이를 거부하고 지속적인 사역을 펼쳐나가게 되자 영국성공회에서 웨슬리의 교구를 박탈하게 됩니다. 교구를 박탈당한 웨슬리는 1739년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치며 "감리교 운동(Methodist Movement)"을 조직적으로 하게 됨으로 감리교회를 시작하게 됩니다. 웨슬리는 경건한 신앙생활의 방법으로 “규칙적 생활'을 강조하는데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규칙쟁이(Methodist)"라는 별칭을 얻었고, 결국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공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감리교 운동이 시작된 배경가운데 존 웨슬리의 회심이 있었습니다. 1738년 5월 참석하였는데 그는 이 집회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주님의 사랑과 은총가운데 24일 저녁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잇 거리에서 모인 모라비안 교도들의 작은 집회에 용서와 평화와 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그 날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9시가 되기 15분 전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설명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올더스게잇 경험으로 얻어진 확증은 웨슬리 생애에 심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습니다. 웨슬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운동은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의 입장을 지닌 감리교회로 발전하였고 교리 중심의 사상적 신학에서 "실천중심"의 신학으로 전개되었고, 웨슬리가 서거한 1791년 교세는 영국 전역으로 확산하여 잉글랜드를 본거지로하였던 감리회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에까지 확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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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의 한국전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1883년 9월 볼티모어 러브레인교회 가우처 (J.F.Goucher)목사는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본부에 한국에 선교사 파견을 주창하여 맥클레이 목사가 한국에 들어와 고종으로부터 1885년 7월 3일 학교와 의료사업을 허락받았습니다. 아펜젤러(H.G.Appenzeller)목사를 교육선교사로, 스크랜턴(W.B.Scranton) 박사를 의료선교사 로, 스크랜턴 박사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여사를 여성교육선교사로 선발하고 한국에 파송합니다. 1885년 6월 20일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스크랜턴의 가족은 인천에 상륙하여, 스크랜턴의 가족들은 서울로 와 여선교회 사업을 준비하고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에 머물다가 7월 29일에 서울로 올라오게 됩니다.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 8월 1일 한국선교회를 조직하고, 배재학당을 시작하며, 스크랜턴 박사는 9월 10일부터 병원을 시작합니다. 10월 11일에 아펜젤러 목사의 집에서 한국인과 처음 예배를 드립니다. 아펜젤러 목사는 정동에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벧엘예배당 지금의 정동제일교회에서 1887년 10월 9일 한국인들이 참석한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후 미(북)감리회와 남감리회는 1930년 12월 2일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기독교조선 감리회'를 조직하였고 1949년 4월 26일 총회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로 명칭을 변경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