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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한국전력기술인협회 50년사 3. 민간인에 영업용 전기 공급 한성전기는 1901년 6월말에 종로와 진고개(현 충무 로)의 일본인 상가에도 전등설치를 권유하여 약 600 개의 전등을 보급하였다. 또한 한성전기는 전등사업의 개시를 기념하고, 이를 시민들에게 널리 선전하기 위하여 1901년 8월 17일 저 녁에 동대문발전소에서 전등개설 의식을 가졌다. 정 부의 고관과 많은 귀빈들이 참석한 이날 발전소 주변 에 가설된 20개의 아크등과 주요 간선도로에 세워진 가로등이 일제히 점등되어 휘황찬란한 불빛이 장안을 밝혔다. 거리는 온통 축제분위기로 들떴고 발전소와 그 주변에는 1만여 군중이 모여 경탄의 눈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한편 전기사업은 이와 같이 그 수요가 점차로 증 가하여 동대문발전소의 전력만으로는 공급력이 부족 하게 되자 1903년 6월 용산에 제2발전소를 건설하고 250㎾의 발전기 2대를 설치하는 한편 남대문 내에는 변전소를 신설하였다. 한성전기의 발전시설이 크게 늘어나자 지금까지 이 설비의 운전을 담당하고 있던 미국 기술자들의 기술 수준이 문제가 되었다. 고장은 빈발하는데 수리가 뒤 따르지 못하여 콜브란은 기사를 일본인으로 교체키로 하고 미국인 기술자를 모두 해고시켰다. 한성전기는 사업을 확장하는데 고종이 콜브란 등과 체결한 건설 및 운영계획에 의한 채무를 청산하지 못 하여 1902년 8월부터 당사자 사이에 심한 분규가 발 생하였다. 그리하여 콜브란과 주한 미국공사 알렌(Allen)은 한 국정부가 밀린 채무를 청산하지 않을 경우 계약에 따 라 한성전기의 전 재산을 콜브란이 소유하여야 한다 고 주장했다. 조선정부는 콜브란이 요구하는 채무가 일방적이라고 반박하고 먼저 한성전기의 장부조사부터 선행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여 마침내 한・미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한성전기의 채무분규는 곧 일반 국민들에 알려졌다. 1903년 7월 종로에서 시민들은 콜브란, 보스 트위크를 성토하고 그들이 운영하는 전차를 타지 말 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시민의 호응을 얻게 된 이 운동은 마침내 7월 10일 에는 시민의 애국심에 의한 자발적인 전차안타기운동 에 참여하라는 호소문이 각 마을과 신문사 등에 배 포되어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시민들의 감정 이 점차 악화되면서 전차에 돌을 던지는 등 운행방해 사태가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한성전기의 종업원이 정부의 관원을 폭행하는 등 사건들이 계속 일어났다. 알렌공사는 소요사태에 대처한다는 이유로 본국으 로부터 미국해병 100여명을 불러들여 한성전기 사옥 에 주둔시키면서 보호임무를 담당케 하였으나 이러 한 모든 사건들은 한동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 였다. 본문1편 _ 132185(ok).indd 142 2014-01-24 오후 6:2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