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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개관 141 쪽 모퉁이 광장에 설치하기로 하였고, 이후 1894년 5월 30일 준공과 함께 창덕궁에도 전기가 공급되었다. 1906년 헤이그밀사 사건 후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 의 각 전각을 휘황찬란하게 복구하고 문화적인 설비 를 갖추어 다음해인 1907년 11월 13일부터 창덕궁을 사용하였다. 창덕궁에 문화의 빛을 공급하기 위한 발 전소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본상사로부터 45마력의 석 유발동기와 25㎾ 직류 발전기를 구입하였고, 1908년 9 월에 건설을 완공하였다. 이 발전소는 지금의 창덕궁 식물원 부근에 있었는데 여기서 창덕궁 궁내는 물론 종묘에까지 송전하여 1910년 1월까지 운영하였다. 그러나 경복궁과 창덕궁의 두 발전소의 운영경비가 너무 많아 1910년 2월부터 한일와사전기회사(韓日瓦 斯電氣會社)에서 수전하기로 하고 1월말에 두 발전소 를 폐쇄하였다. 제4절 최초의 민간점등과 영업용 전기 공급 1. 최초 민간 점등 전차사업이 안정되면서 한성전기는 주간에만 운행 하던 전차를 1900년 4월 9일부터 먼저 청량리・서대문 노선과 청량리 - 남대문 노선을 밤 10시까지 연장하여 운행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전차 운행시간이 밤 10시 까지로 연장됨에 따라 승객의 이용이 많은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의 조명을 위하여 1900년 4월 10일 종로 에 3개의 가로등을 설치해서 점등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점등(民間點燈)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날을 기념해 1966년에 4월 10일을 “ 전 기의 날 ” 로 제정하였다. 2. 왕궁에 영업용 전기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에 의해 우리나라는 러시 아의 힘을 빌려 일본세력의 전진을 저지하려 했었다. 또한, 러시아는 독일, 불란서 3국 간섭의 여세에 편승, 그 공동의 권력을 이용하여 만주의 경영을 장악하려 고 일종의 견제외교를 시도하였다. 한국을 둘러싼 복 잡한 국제관계속에서 고종은 왕자와 함께 1896년 2월 21일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였다가 1년이 지난 1897 년 2월 20일에야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경운궁이 왕궁이 되자 당시 한성부 판윤 이채연은 40마력 엔진 1대와 25㎾ 직류발전기를 일본에 있는 홈링거상사(Home Ringer and Co.)로부터 구입하고 홈링거상사의 기사 코엔(Koen)에게 작업시켜 1900년 봄 경운궁에 약 900개의 에디슨 램프를 점등하였다. 한성전기는 1901년 4월 동대문발전소의 증설과 함께 배전시설공사도 동시에 추진하는 등 전등 사업을 서둘 러 같은 해 6월 17일 제1단계로 당시 왕궁이었던 경운 궁(현 덕수궁)의 편전 등에 우선 전등 6개를 설치하였 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영업용 전등이 되었다. 본문1편 _ 132185(ok).indd 141 2014-01-24 오후 6:2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