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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12월 5일: 문두영(19, 남) 등 5명은 열안지오름 부근 북두굴로 피신했다 가 토벌대에 발각돼 총살되고, 고원진(29, 남) 등 6명은 오라리 공회당 부근에서 토벌대에 공개총살됨 1949년 2월 18일: 송태평(40, 남)은 오라국민학교 교장으로 학교 소각 후 이호국 민학교를 방문했다 도두지서로 연행된 뒤, 도두리 동박곶홈에 서 총살됨4 (도두리-학살터-동박곶홈, 참조) 10월 2일: 강병일(40, 남)5 등 7명은 1949년 6월 28일 군법회의에서 사 형을 언도받고, 이날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됨 (용담리-학살터- 제주비행장, 참조) 정실 마을은 1948년 11월 19일에 소개했다. 그 직후 연미마을을 포함한 오라2 리 나머지 마을들은 소개를 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런 소문이 돈 것도 잠깐 다음해인 1949년 1월 2일, 초토화 작전으로 2리 주민 모두는 마을에 서 쫓겨났다. 당시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가기보다는 눈 덮인 한라산을 선택 했다. 해안마을로 내려가 경찰을 대하며 두렵게 살기보다는 먼저 산으로 피신 가 있는 동네사람들 대열에 합류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사람들은 매일같이 들이닥치는 토벌대를 피해 열안지오름 인근의 비남도나 가미왓은 물론 점점 더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마을 초토화 후 한라산에서 피난생활을 이어갔던 오재옥(2003년 76세)의 부인은, “음력 섣달 초사흗날 마을을 불태웠어. 내가 첫 딸을 음력 12월 2일날 낳 았으니까 기억을 할 수 있지. 그날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야. 순식간에 불을 다 질 렀어. 그로후젠 내가 아이를 업고 눈 쌓인 산에 가서 피난생활을 했지”라고 회고 했다. 또한 오재옥도, “그 아이는 추운 겨울 산에서 피난하랴, 도망하랴 하다보니 젖 한 번 제대로 물리지 못하고 죽어버렸지. 모두 불 태우고 가버렸으니 남은 건 목숨 하나뿐이었어”라며 한탄했다. 당시 한라산에서 피신생활 중 학살된 대표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4) 당시 송태평을 구명하려던 친구 김기주(32, 남, 도평국민학교 교장)도 이날 함께 총살됨 5)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을 통해 신원이 확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