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page

143 제주읍 차례로 방화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집들을 지목한 것은 아마도 민오름에 납치됐 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의 진술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2 오라동에서 발간한 마을지에는 이 사건이 더욱 상세하게 수록돼 있다. “1948년 5월 1일 일단의 청년들이 처음 불지른 곳은 오라리 연미마을 섯동네 허두경 의 집이었다. 곧이어 허두경과 이웃에 있었던 강병일(39세)의 집에도 불을 놓았다. 허 두경이나 강병일은 집에 없었다. 허두경의 부인이었던 고시성 할머니는 ‘대낮에 청년들 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안채와 바깥채, 외양간 등을 불 질렀다’면서, ‘그들 무리 속에서 앞장서서 씩씩거렸던 사람은 같은 동네 살던 대청단원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들 청년단 은 강병일의 집에서도 안채, 바깥채, 외양간을 모두 불태웠다. 그때 시간은 12시께. 30 명가량의 청년들은 손에 몽둥이 등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어 연미마을 중동네로 건 너와 박태형(39세, 이명 박삼봉), 강윤희(30세) 집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동네의 박전 형(28세, 이명 박종실) 집 등 세 집 여섯 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당시 박태형의 집 안채 에는 부인과 2남 기환(17), 3남 기찬(15)이, 바깥채에는 칠순의 부모가 있었다.”3 결국 오라리 방화사건은 무장대와 9연대 간의 4·28평화회담을 결렬시켰고, 그 후 미군정은 강경토벌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1948년 5월 초, 미군정은 9연대장 김익렬을 해임했다. 그리고 9연대를 확충해 11연대를 편성한 다음 연대장으로 박진경을 임명하고 강경진압에 나서게 했다. 그 후 마을주민들이 학살된 주요사건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6월 7일: 경찰가족 김정금(54, 여)이 오라리 집에 소 먹이를 주러갔다가 무장대에 피살됨 6월 14일: 3·1 발포사건 희생자 허두용의 아버지 허을수(44, 남)가 토벌 대에 총살됨 2)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전예원, 1995, 160쪽 3) 오라동, 『오라동 향토지』, 2003, 2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