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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1947년 3월 1일: 양무봉(50)과 허두용(16) 1 은 경찰의 3·1발포사건으로 사망했다. 3·1발포사건에 제주도민들은 3·10총파업으로 대항했다. 이 파업에는 제주도민 90% 이상이 참여했고, 미군정은 이를 남로당의 배후조정으로 보아 도민들을 무 차별 검거하기 시작했다. 오라리는 경찰·우익단체와 마을 활동가들 간의 대립이 극심했다. 1948년 4월 30일: 강공부(21, 여)가 무장대에게 끌려가 민오름에서 피살되면서 오라리 방화사건의 한 원인이 됨 5월 2일: 박두인(32, 남, 오라리 대동청년단장)이 무장대에 끌려간 뒤 민 오름 부근에서 피살되고, 아들을 찾아나섰던 모친 서기생(74, 여) 역시 같은 장소에서 총살됨 미군정은 4월 30일 무장대의 강공부 납치·학살 직후,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 영화를 제작한다. 이 영화는, ‘게릴라가 마을을 불 태우자 곧 경찰이 추격하고, 마을 주민들은 방화는 무장대의 소행이다 증언’하는 일련의 내용이 찍힌 동영상이다. 그러나 영상 속 ‘불타는 오라리’ 사건의 진실은 당시 미군정의 보도와는 달랐다. 미군정은, “평화회담에 반대하는 무장대가 주민 을 납치해 학살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그러나 제민일보의 4·3은 말한 다 특별취재반은 현장 취재를 통해, “오라리 방화사건은 경찰과 우익단체원들이 마을활동가들의 집을 불태운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제민일보는 여 러 증언을 종합해, “전날 민오름에 잡혀가 무장대의 손에 살해된 대청단원 부인 (강공부)을 마을 인근 제기물동산에서 장례를 치른 대청·서청 단원들이 경찰의 묵 계 속에 마을에 들어와 허두경 → 강병일 → 박태형 → 강윤희 → 박전형의 집을 1) 해안리 가족묘지에 안장된 허두용의 비석에는 “(전면) 落鄕 20世 陽川 許공 斗瑢 之墓 (후면) 公諱는 두용 양천 허씨 后人 祖는 別監 휘는 敏이다. 考諱는 을수이며 妣는 강기생의 차남이다. 공은 1932 년 壬申생이요 1947년 丁亥 2월 9일 공은 제주 3·1절 기념식 참석 귀가 중 경찰의 무자비 발포로 관 덕정 옆에서 초등학생 16세를 一期로 가엾게 사라진 무명초라 그 後恨은 4·3사건의 戀結이요 도민 의 비극의 역사에 도화선이었다”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