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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제주4·3유적 Ⅱ _ 서귀포시편 거고, 신탁통치 반대하라고 하니까 반대하고 한 거라. 우리 신효만 해도 현○필 씨가 우 리 마을 이장이었어. 그때 인민위원회 간판 붙였어. 그런데 이제 미군이 오니까 잡혀간 거라. 그래서 사흘만에 나와서 돌아왔는데, 그때 ‘이거 사람할 노릇 아니’라고 해서 이 장을 그만뒀어. 그 당시에 제주도는 어디든지, 학교든지 관공서든지 전부 다 인민위원 회 간판 달았지.” 해방 초기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고씨의 증언에도 그러한 마을 분위기가 엿보이는데, 그는 그러면서 이들 인민위 활동가들의 성향에 대해 서는 전부 좌익성향의 인물들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증언은 사실과 많은 차이가 있다. 당시 인민위원회의 마을 책임자들은 ‘대체로 이념과 무관한 지역 원로들’이 추대돼 활동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초기 읍·면의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위원장들은 대체로 이념과 무관하게 지역 원로들이 추대되었다. 읍·면 위원장은 제주읍 현경호(玄景昊), 애월면 김용해(金容海), 한림 면 김현국(金顯國), 대정면 우영하(禹寧夏), 안덕면 김봉규(金奉奎), 중문면 강계일 (康桂一), 서귀면 오용국(吳龍國), 남원면 현중홍(玄仲弘), 표선면 조범구(趙範九), 성산면 현여방(玄麗芳), 구좌면 문도배(文道培), 조천면 김시범(金時範) 등이었다. 제주도 인민위윈회의 초기 활동은 행정기능을 발휘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치안 활동에 주력했다. 이것은 인민위원회가 본래 행정기구를 표방했지만, 미군정에서 이를 인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기관을 인수하지는 못했지만 앞에서 보듯 실질적인 내용면에서는 읍·면사무소의 인적 구성 등에서 영향력을 발휘했 다” 1 하고 있다. 1948년 5·10선거에서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는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돼 1년 후 다시 치러졌다. 그러나 남제주군은 신효리 출신 오용국이 무소 속으로 출마해 투표율 86.6%로 당선됐다. 오용국은 일제시기 면장을 지냈고, 해 방 후 서귀면 건국준비위원장도 맡았던 인물이다. 신효리는 당시 정치색이 옅어서인지 신효마을 출신 입산자가 거의 없었다. 그 래서 다른 마을에 비해 4·3으로 인한 인명피해도 적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1)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