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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10.19사건의 배경
남한만의 단독 선거·단독 정부가 추진되면서 각지에서는 여기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으며, 미군정은 제주4·3사건 초기에 각도에서 경찰을 차출, 경찰을 동원한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은 제주4·3사건 초기에 경찰의 힘만으로 진압이 되지 않자, 진압 작전에 국방경비대를 동원하였다. 경찰은 해안 부근 마을의 치안활동을 담당한 반면, 국방경비대는 빨치산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렇듯 국방경비대의 토벌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을 때, 이에 대한 저항이 제주도 모슬포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1948년 6월 18일, 초토화 작전을 지휘했던 제9연대장 박진경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제9연대 부대원 탈영 사건과 함께 동족을 살상하는 작전에 반대하는 국방경비대원들의 저항이었다. 박진경 암살 사건을 계기로 전군 차원의 사상검열이 이루어지면서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과 동조자를 축출하기 위해 숙군(肅軍)이 시작되었다. 숙군은 각 연대별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숙군의 여파는 광주의 제4연대까지 미쳤고, 제4연대의 숙군은 제14연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른바 '혁명의용군사건'으로 연대장인 오동기 소령이 연루되어 구속된 후 남로당 세포 조직으로서 제14연대 독립대와 재정을 맡았던 이등중사 김영만이 제4연대 근무할 당시 그의 세포 조직원이었던 제4연대원의 밀고로 10월 11일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14연대 남로당 조직의 위기감은 높아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제주도 파병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었다. 10월 15~16일쯤, 여수우편국 일반전보로 '제14연대는 10월 19일 20시에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제주도 출동 명령은 좌익들에게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일'과 '봉기' 사이에 양자 선택을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