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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9시가 되자 이번에는 저지지서 경찰들이 조수리로 들이닥쳤다. 경찰은 조수국민 학교 교사 김창심(25, 남)과 양공옥(25, 남), 이성율(23, 남), 조철남(20, 남), 양명 식(19, 남)과 주민 김경욱(24, 남), 조기완(28, 남), 조유겸(29, 남) 8명을 체포하 는 한편, 주민들을 조수국민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체포한 8명 가운 데 양공옥을 제외한 7명을 무장대와 내통했다며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했다. 양공옥은 그 후 저지지서로 연행돼 고문취조를 받다 11월 27일 총살됐다. 또한 당시 이 학교 교장이었던 양명만(50, 남)은 등사판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한국전쟁 후 예비검속됐다가 정 뜨르비행장에서 학살됐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국회에서 양민학살 피해신고를 받기 시작하자 조수리 의 한 유족 1 이 다음과 같이 신고했다. “1948년 음 10월 22일 조수리 리민을 조수교 교정에 집합시키고 두모지서 주임 김○○이가 조수리민 200 명을 죽인다고 선언하자 뒤이어 현○○이가 명령하여 총살함.” 위 신고서의 김○○는 김문경으로 당시 계급이 경사였고, 두모지서 주임이 아닌 저지 지서장이었다. 그는 1948년 12월 5일 저지리가 소개되면서 저지지서가 일 시 폐쇄되자 두모지서로 옮겼다. 현○○는 현처묵으로 북한 출신이다. 그는 1948 년 5월 13일 저지지서가 무장대 습격으로 전소된 직후 저지지서 응원경찰대장으 로 파견됐다. 저지지서가 일시 폐쇄되자 고산지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계 급은 경위였다. 2 1) 제4대 국회, 『양민학살진상규명 신고서, 북제주군 접수번호 356』, 1960 : 조태오가 부친 조기완 (1922 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법에 의해 처리해주시길 요망’ 한다며, 1960년 6월 5일 국회에 신 고했다. 한편 제주4·3연구소는 현경대 국회의원실의 협조로 국회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양민학살진상규명 신고서>를 입수했다. 그러나 신고서는 펜글씨로 휘갈겨 쓰여 있어 판독이 어려웠다. 4·3연구소는 제주시청 호적계장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고원희를 소개받아 원문을 읽어내고 2001년 『북제주군 편』과 『남제주군 편』 두 권으로 나눠 자료집을 출간했다. 2) 제민일보4·3취재반, 『4·3은 말한다』, 조수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