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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그 후 고산리에서 벌어진 주민학살은 주로 소개민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1948년 12월 5일께 한경면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졌다. 저지리와 조수리, 청수리 주민들 중 상당수가 고산리로 소개했다. 당시 소개민들은 고산국민학교에 임시 수용됐다. 소개민에 대한 학살은 수용 첫날부터 벌어졌다. 토벌대는 고산국 민학교에 있던 소개민들 중 일부를 지목했다. 그리고 수차례에 걸쳐 이들을 고산 중학교 북쪽밭-1과 북쪽밭-2, 조두리동산에서 학살했다. 이 학살 사건들로 인한 소개민 희생은 확인된 것만도 53명에 이른다. 한편 고산주민들은 마을 방어를 위해 민보단을 조직하고, 그중 20~30세의 청 년 70~80명은 군경토벌대의 토벌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대한청년단을 결성했다. 그러나 군경토벌대에 대한 이러한 협조에도 불구하고 1950년 한국전쟁 후 고산 주민들에 대한 학살극은 되살아났다. 예비검속자 학살사건에서였다. 당시 제주도 전역에서는 예비검속자 학살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산리의 예비검속자들은 1950년 8월 20일, 모슬포의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제3구 경찰서(모슬포 경찰 서) 관내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학살됐다. 당시 고산리 희생자는 강승호(22, 남)를 비롯한 12명의 청년들 1 이었다. 고산리의 축성은 1, 2차로 나뉘어서 이루어졌다. 1차에 쌓은 4·3성은 1구를 중 심으로 1948년 12월 20일부터 고산주민은 물론 소개민들이 총동원돼 1개월간 의 노력으로 완성됐다. 그 후 1차로 쌓은 성에 포함되지 않았던 신물동네와 일곱 도로동네, 도논동네, 한장동은 각 동네마다 별도로 성을 쌓았다. 이중 특이한 것 은 한장동의 4·3토성이다. 한장동 지역에는 돌이 귀해 흙으로 성을 쌓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산리의 정부 인정 4·3희생자는 33명(남성 30명, 여성 3명) 이다. 1) 이들 12명은 강승호(22, 남), 강재윤(28, 남), 고완봉(24, 남), 고원식(23, 남), 고행칠(35, 남), 김응흡 (29, 남), 변재옥(20, 남), 신응인(38, 남, 이명 신응린), 조경호(25, 남), 좌두남(22, 남), 좌성인(23, 남), 좌중호(18, 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