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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 한경면 6. 고산리 4·3 시기 고산리는 1구와 2구로 나뉘어진 1,000가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1 구에는 한장동과 자구내가 포함돼 있었고, 2구에는 신물동네(新水洞)와 일곱도로 동네(七田洞), 도눈동네(錢沓洞)가 속했다. 고산리에는 일제강점기부터 고산지서 가 있어 치안을 담당했다. 1947년 3월 1일 한림에서 열린 제28주기 3·1절 기념식에 고산 청년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 후 제주도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집회에 참가했던 일부 청년들이 경찰에 검거되기 시작했고, 이에 고산청년들의 왓샤 시위가 간간이 이어졌다. 그 러던 1948년 2·7사건 직후, 경찰과 청년들 간에 최초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48년 2월 11일, 주로 2구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가 지서 앞에 모여 구속 자 석방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했다. 시위를 주도했던 청년은 다리 에 부상을 입고 검거됐다. 나머지 청년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고산에서 최 초로 총기가 발포된 사건이었다. 고산리 최초 주민 학살사건은 초토화작전 초기인 1948년 11월 10일에 벌어졌 다. 이날, 고산지서 경찰은 불법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11월 초에 고산지서로 연행했던 고산리 고태붕(31, 남)을 비롯한 6명을 고산신협 뒤쪽 논 (아래 학살터 -고산중학교 북쪽밭-1, 참조)으로 끌고가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