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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제주4·3유적 Ⅰ_ 제주시편 의아해 했음. 활동을 하거나 앞에 나서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 임. 그는 1949년 7월 1일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마포형무 소에 수감됐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행방불명됨 11월 미상일: 용수리 주민 김공인(25, 남, 농업)이 토벌대에 의해 고산지서로 연행됐다 제주읍으로 이송됨. 그 후 그는 1949년 7월 5일, 군 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됨. 그는 한국전쟁 이 발발하면서 행방불명됨 1948년 12월 5일, 한경면 중산간 지역에 소개령이 내려졌다. 중산간 마을 주민 들은 고산리를 비롯한 해안 마을로 소개했다. 이즈음부터 각 마을은 마을 나름의 4·3성을 쌓기 시작했다. 용수리 역시 1949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성을 쌓았다. 축성에는 용수리 주민들과 소개민이 모두 참여했다. 당시 용수 2구였던 용당리는 용수리와 별도로 성을 쌓았다. 그러나 현재 용수리와 용당리 4·3성의 흔적은 찾 아볼 수 없다. 비교적 평온했던 용수리에 피바람이 몰아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현재 확 인된 자료에 따르면 16명의 주민들이 예비검속됐고, 이들 모두는 모슬포의 섯알 오름 등지에서 학살됐다.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고공오(27, 남), 고기남(40, 남), 고익준(27, 남), 고자흡(27, 남), 김병돈(20, 남), 김봉 수(31, 남), 김시백(35, 남), 김태호(30, 남), 박성언(46, 남), 양두석(24, 남), 양태숙(36, 남), 이영호(35, 남), 이재호(23, 남), 장종선(23, 남), 장경화(21, 남), 좌정준(35, 남) 당시 김시백을 제외한 15명은 대정면 상모리 절간고구마 창고에 구금됐다 8월 20일 섯알오름에서 학살됐다. 그 동안 김시백도 다른 희생자와 함께 섯알오름에 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됐었다. 그러나 2007년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유 해발굴 결과 김시백은 이곳 비행장에서 학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가 인정한 용수리 4·3희생자는 19명으로 모두 남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