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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성(忠州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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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충주읍성은 이후 거의 방치되어 있었는데, 1869년이 되어서야 충주목사 조병로에 의해 증축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조칙이 내려오자, 충주에서도 1869년 2월부터 읍성을 개축하기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준공하였다.
조병로가 지은 충주읍성 축성기(築城記)」와 사성문(四城門)의 상량문 기록에 의하면, 신축한 읍성은 벽돌을 사용하였고.
405개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를 신설하였다고 한다. 읍성의 둘레는 3,950척(약 1.817m)인데, 이전보다 300척이 더 넓어진 것이다(포백척 기준-46.73cm).
상량문에 의하면 서문이 가장 크다고 했는데, 문루(門樓) 규모는 북문이 가장 크고 남문, 서문, 동문 순이다. 문루의 규모와 문의 크기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이다. 읍성의 두께는 25척(약 11.5m)이고, 높이는 20척(약 9.2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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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에 세운 충주읍성 축성사적비(築城事蹟碑)」에도 축성기(築城記)와 동일한 읍성의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다만. 성가퀴의 수가 405개에서 415개로 10개가 늘어 있다. 충주읍성의 축조는 다른 군현과 비교해서 물량이나 성과면에서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이러한 공로로 개축을 주도한 조병로 목사의 관직 품계가 높아졌다.
충주읍성은 1896년 유인석 의병의 충주성 전투 중, 북문을 제외한 3개문과 서문 수문청을 제외한 3개의 수문청이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가 일제에 의해 완전 파괴되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저항의지를 분쇄하려고 하였는데. 그 시작이 서울 도성과 각 군의 읍성을 철거하는 것이었다. 1907년 7월 30일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城壁處理委員會)」를 발족하고 급속히 각 지역 읍성의 성벽을 헐어냈는데, 이는 읍성이 갖고 있던 상징적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