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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5월31일 토요일 12 (제221호) 기획 구한말고종시대전형적인유학자출신관료인박시순(朴時淳·1848~1907)은어려서글을잘쓰고사부를잘지었으 며부친의엄격한가정교육과가르침을받았 으며효를중시하고몸소실천하였다.종손집안으로어려서부터대소가의집안일을지켜볼수있었다.그리고이는 그의위선정신에큰영향을끼쳤다.문과에급 제하여요직을거쳤고때로는질시하는자들로인해유배를가야했다.그러나그는지방목민관으로있으면서일기를 남김으로서19세기후반의관료들의사회상 과구한말조선의역사를되돌아볼수있도록중요한자료를제시하기도했다.이에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韓末 官人朴始淳日記’를펴낸바있어소개해본다. 공의휘(諱,이름)는시순(始淳)이요,자는 윤원(允元) 이고호는국인(菊人)이다.1891년(고종28)에태순(台淳) 에서시순(始淳)으로이조에서계목(啓目)으로고장(告 狀)을올려이름을바꾸었다. 증영의정무환당공휘박대 립(朴大立)의11대손이요.병조참판귀옹공휘박경후(朴慶 後)의6대손이다.부친만송공(晩松公)광석(光錫)과어머 니하동정씨와의사이에장남으로헌종14년(무신1848년)4 월9일황해도평산군(平山郡)여주동(如珠洞)에서출생하 였다. 아버지만송공은재주가출중하였으나사장에는운 이 따르지 않는지라 일찍이 서재(書齋)를 설립하고 척목 (尺木)이라 이름하고 엄립과조(嚴立科條 :엄하게 규정을 세워)로후진을훈도하니수학문인중에는대소과에급제 한이가많아사림(士林)들이선생을공경하고칭송(稱頌) 하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공은 자연스럽게 여러 문 인들과 함께 서재에서 학습을 할 수 있었다. 공은 유년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하였으며 영리하고 문장이 출중하였다.또한 운자(韻字)를달아지은 한시, 즉 사부(詞賦)를 잘 지으니 명사들도 공의 뛰어난 능력 을눈여겨보았고크게될인물이라고칭송이자자(藉藉) 하였다.고종16년(기묘1879년)31세의나이로과거를보 아 정시병과(庭試丙科)8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황해 도평산에서한양에올라가과거(科擧)시험을보아급제 (及第)하기란 당시 사회적 배경과 지리적 환경으로 볼 때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인지 짐작(斟酌)이 될 것이다.공이합격해서방(榜)이붙으니종형박홍순(朴 鴻淳)은이를지켜보고있다너무기뻐서하룻밤에여주 동(如珠洞)까지삼백리길을한걸음으로달려가서집안 사람들에게알려주니이사실을들은사람들은모두가 문을빛냈다고대환호성(大歡呼聲)을올렸다. 이후1891년(고종2812월)에서학교수(西學敎授)를거 쳐수찬(정6품)이되었고,사헌부지평(정5품)에제수되 었다.1892년(고종 29)에 사헌부 장령(정4품)거쳐 통례 원 우통례(右通禮:정3품)로서 고종의 존호가상[尊號嘉 上:임금이나왕후의존호(尊號)에다시더존호를붙이던 일]에참여한공으로가자(加資:품계를올려주는일)되 었으며,1893년(고종30)에는첨지중추부사(정3품)로당 상관에 오르고,그해 승정원(현 비서실)동부승지와 우 부승지(右承旨:정3품)로고속승진하였다.그러나동년8 월대간(臺諫)안효제(安孝濟)의상소를접수하는과정에 서일대수난을겪게되었다.안효제의상소는관왕묘(關王 廟)의허구성을비판하고궁중에서성행하던불교행사의 부당성을지적한것이었다.그러나정언김만제(金萬濟)가 안효제의상소를흉소(凶疏)로지목하여비판하게되었고, 공은승지자리에있으면서 할 수 없이 이를받아들였는데 역시같은편에속하는사람으로매도되어파직되고말았 다.이때가1893년(고종30)8월26일이었다. 박시순은파직된그날로함경남도홍원(洪原)에유배되 어1894년(고종31)6월까지약10개월동안유배생활하였으 며,1894년(고종31)6월8일특별사면으로풀려나우승지(右 承旨)에복직되었다.그러나복직된지4개월만에자청해 서면천군수(沔川郡守)로자리를옮긴이래1894년10월-189 5년6월까지8개월부임하고1895년(고종32)6월부터는임 실군수(任實郡守)에1895년6월-1896년2월까지8개월부임 하였다.1897년(광무1)에장례원장례를거쳐1900년(광무4) 비서원승으로제수되었다.1904년(광무8)2월부터는장연 군수(長淵郡守:황해도)에19042월~1905년까지재직하면서 문헌비고속편찬위원도겸임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일본 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인황해도평산(平山)으로돌아왔다.그러나그즉시일 찍이점지해두었던부여은산가곡리로이주하여3년을 지내다1907년60세의나이로생을마감하였다.   박시순의 생애와 관련하여 특기할 사항은 그가 유 배 또는 관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일기를 남겼다는점이다.그가남긴일기는〈정원일기(政院日 記)〉, 〈북정일기(北征日記)〉(유배일기(流配日記)), 〈면불일기(沔 삘 日記)〉, 〈운불일기(雲 삘 日記)〉, 〈서불 일기(西 삘 日記)〉(이상 官職日記)와 민장치부책(民狀 置簿冊)인 〈민소책(民訴冊)〉, 〈공언청리(公言聽理)〉, 〈관지책(官旨冊)〉등이있는데,모두19세기후반의관료 들의사회상을이해하는데필수적인자료들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일기의 대부분을 모아 『韓末 官人朴始淳日記』(韓國學資料叢書22,1999)를간행한바있 다.본서에 수록된 품목(稟目)·품고(稟告)(이상 소차계장 류(疏箚啓狀類),보장(報狀),군관좌목(軍官座目),고목(告 目)(이상 첩관통보류(牒關通報類)),양청교우(量晴較雨), 일기청의궤(日記廳儀軌), 장연군사안(長淵郡査案)(이상 치부기록류(置簿記錄類)역시박시순의관직생활과관계 된 문서들이며,이외 소지류(所志類)·시문(詩文)·간찰(簡 札)중에도박시순과관련된문건이다수를차지하고있다. 한편부여로이거한공의집안은박동익(朴東翼)형제와 그의자녀와조카들이중심이되어부여일대의교육활동 을주도하는한편항일운동에도매우적극적으로참여하 였다.박동익과장자만희(萬熙)는신명의숙(信明義塾)의 설립과운영에깊이관여하였는데,많은사료중에수록된 〈信明義塾發起員錄〉,〈信明義塾規則〉,〈賞狀〉(이상置簿記 錄類참조)은근대교육과관련하여매우주목되는자료이 다.동익의차자영희(寧熙)는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서김좌진장군비서겸부사령관으로혁혁한공을세워항 일독립운동가“박영희장군”으로잘알려져있다. 공의집안을종합해볼때병조판서를지낸휘朴習에서 朴興新에이르는11대가한양에서사는시기는비록일시적 인가화가있었지만중앙의사환가(仕宦家)로서성장·발 전하던시기였고,朴台甲-朴奎淳에이르는5대가이천이거 기(利川移居期)에는남인의정치적상황과운명을같이하 며정치·사회적으로침체하던시기였다.그리고부여로이 거한이후에는박시순을중심으로집안품격의신장을도 모하는 한편 근대교육을 주도하고 抗日運動에 참여하는 등民族運動에적극노력하던시기로규정할수있다. 박시순(朴始淳, 1848~1907)은 조선 말기부터 대한 제국초기까지활동했던중앙및지방관료이다. 1884년 겨울,개화당 젊은 관리들이 벌인 갑신정변은 실패로막을내렸다.일본의뒷배를믿고3일천하를외친 그들은몰락했고,조선의개화는피로물들었다.그러나 그불씨는사라지지않았다. 갑신정변이후10년동안조선은겉으로는비교적평 온한시기에있었지만,내부적으로는심각한사회위기 가잠재해있었고,조선왕조의봉건통치는빠르게궤멸 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개혁사업이 유명무실해 지면서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조선의 통치자들은 향락 을 더욱 탐내어 취생몽사(醉生夢死), 매관매직(賣官賣 職),관청의 뇌물공여((賂物供與),서로 나누어 먹기식 과거시험은양반들의교역의장으로전락하였습니다. 국내 지배계급의 더욱 가혹한 억압과 외국의 경제적 침략은 가뜩이나 가난한 서북부지역을 막다른 길로 내 몰았고1894년의동학농민운동과청일전쟁,그리고일본 의군사적개입은조선을근본적으로뒤흔들게되고사 회전반의암흑과부패는극에달했다.그당시유생학사 들이잇따라나라의정서를혼란스럽게하는상소를올 렸고,고종과민비는함께상주문(上奏文)을읽었다."가 시가있는것을보면역적을눈여겨보며죄를씌운다"고 했고,1895년8월,관료안효제(安孝濟)의탄핵상소도같 은맥락에서처리되니박시순은누명을쓰고함경도홍 원으로유배되었고이건창,권봉희,안효제,장병익등상 서한언사들은모두엄중한형벌을받아배속되었다.공 은약10개월뒤특별사면으로복직되다.이 사건은 당 시 정치적으로 개혁 반대파의 숙청, 지방관 인사 개 편, 권력 재편 과정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있으며갑 오개혁기 정치 혼란과 무관하지 않음과 정치적 희생양 에가까운존재로보여주는사례이다. 그와중에등장한것이갑오개혁이다.개혁은중앙에 서시작됐지만,그실천은지방에서이루어져야했다.군 수(郡守),즉 지방관 이야말로 조선의 개혁을 실현하는 최전선이었다.공은면천군수(沔川郡守)로1894년부터1 895까지재직하고있었고면천은지금의충남당진지역 으로,공의8대조가묻힌곳이며가족과지인이많았고선 조들과 친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다.박시순이 복직 후 면천에다시부임했다는것은지방관의인사배치에연 고가작용했음을시사한다.이시기는바로갑오개혁(189 4)시기로,조선의전통적행정체계가해체되고근대적 인제도개혁이이루어지던과도기였고,이시기에동학 농민운동(1894)은조선내부의민란이자반봉건·반외세 성격을띠었고,동학농민군진압을명분으로청과일본 이조선에군대를파병하면서청·일전쟁(1894)이발발하 게된다.결과는 일본의승리로끝나면서일본주도의개 혁이강요되고,일본은조선에내정개혁(갑오개혁)을강 제로추진하게되니 이로 인해 조선은 정치·사회적으로 극심한혼란을겪게된다.지방에서도민심의불안과행 정혼란이컸던시기였지만이와중에도공은면천군수로 서행정실무를성실히수행하며,당시의행정절차,민원처 리,재난대응,의례행사(제사,기우제등),지방 방역 등 전 통행정업무를꾸준히수행했던내용들이일기에꼼꼼 히 기록되어 전한다.이는『면불일기(沔삘 日記)』,『운 불일기(雲삘 日記)』등을통해확인할수있다. 격변의 시대에 묵묵히 행정의 중심에서 바르게 처신하였고 관인으로 소임을 다하였다.공과 갑오 개혁(1894-1895)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으로 개혁 을주도하거나저항한인물은아니지만,개혁의영 향을직접적으로받은지방관료로서그역할과기 록이매우중요하다.이관계를이해하기위해선공이활 동한시기와갑오개혁의성격, 그리고 지방행정에 미 친영향을함께살펴볼필요가있다. 중앙 행정 개혁으로 과거제 폐지와 신분제 철폐, 재무를 담당하는 중앙 관청인 탁지아문(度支衙門) 을 신설하는 등 전통적 유교 질서의 약화와 근대 관 료제 도입 시도되었고 지방의 행정개혁도 이루어졌 는데지방행정체계개편과군현제도정비및지방관 의 직무 변화 등 갑오개혁의 명령은 중앙에서 내려 오지만, 군수로서 지방 행정의 실질적 운영과 변화 된제도적용을담당해야했다. 하지만, 공의 『면불일기』를 보면 유교 질서 약화 와 가치관의 충돌은 지방에서는 개혁이 늦게 또는 부분적으로만 적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보인 다.오히려제사,기우제,향촌유림과의교류등전통 유교적 역할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고 전통 적지방관업무(제례,민원,군역,방역등)를지속적 으로수행하고있어갑오개혁의내용이거의반영되 지않음을보여주고있어지방관들은중앙의개혁에 도불구하고기존의방식대로행정을지속했음을보 여주는귀중한사료가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박시순의 기록에는 중앙에서 외치 던‘근대화’나‘신분폐지’와같은구호는자취를감춘다 그는역사적으로중요하지않은인물처럼보일수있 으나, 그의 기록물과 활동은 조선 말기 지방행정과 사회 상을보여주는매우귀중한사료로평가받고있다.『한말 관인박시순일기』의중요성은높이평가받고있다.그의 일기및공문서는조선말기지방관의실제생활과업무 를 상세히 보여주는 드문 사례이며 특히 공의 『면불일 기』는 지방관의 일상 업무,지역민과의 관계,전염병 대 응, 제사, 자연재해 대처 방식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는데 그저 시골 군수로서 묵묵히 백성들과 함께한 인물이었 다.그러나그의치밀한일기와문서는지금우리에게조 선 말기 지방행정의 실체, 그리고 중앙 개혁과 지방 현실 간의괴리를생생하게증언해주고있어사료적가치가 높다.학계에서도이를통해조선말기지방행정,유교적 제례문화,관민관계등을연구발표하고있다. 공은 조상을 위해 일하는 위선(爲先)사업에 대해 얼마나 성의(誠意)가 지극한지 모르겠다. 서학교수 를 지내다가 1893년(高宗30 懋 已)에 우부승지(右副 承旨)를제수(除授)받았다. 공의 위선(爲先)사업은 행정관료의 경험을 바탕 으로 상황판단과 시급을 조절하며 종친들을 소집하 고합의를도출하여주도적으로일처리를차질없이 마무리하였다.그이듬해1895년에는임실군수(任實 郡守)로 전보 발령되었는데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 로 추진되는 갑오개혁이 공(公)으로서는 정신적으 로 견디기 어려운 시기에 중앙에서 남아 있기에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여, 자청 한것으로보인다. 임실에서함양까지의거리 는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소문을 접하게 된다. 함 양의 시조 상서공묘(咸陽始 祖尙書公墓)는 중년에 일시 실전(失傳) 했다가 다시 찾은 지 190여년 만에 또 이변(異 變)이 생긴 것이었다. 그 사산 국내(四山局內)는 시조상서 공의 사패지지(賜牌之地)다. 묘하(墓下)에 자손이 살지 않 고멀리떨어져제대로수호(守護)하지못한소치이겠 지만 그 틈을 타서 그 고을 읍속(邑屬)이란 자가 쥐꼬 리권력을남용(濫用)하여남의산을함부로팔아먹고 투장(偸葬)하며 일부러 불법(不法)한 행동(行動)을 함으로써무덤이무려20여장이나되며국내(局內)를 거의빼앗기다시피되어있었다. 그사연을듣고그해10월지망(之望)에성묘도할겸함 양사금동을찾았다.그날은마치세사(歲事)날이라제종 (諸宗)들이모여있었다.국내를살펴보니송추(松楸:소나 무와오동나무)는남벌(濫伐)하여엉성하고남의무덤이 군데군데너저분하게흩어져있었고이에대한이야기를 들고사실을확인해보니그전부터있던고총(古塚)이아 니라근자(近者)에와서몰래투장(偸葬)한것이라한다. 공은그말을들으니치가떨리고분통(憤痛)을참지 못하였다. 종유사(宗有司) 박원익(朴源益)과 더불어 사후대책을논의한끝에연명(連名)으로소장(訴狀)을 작성하여우선먼저군부(郡府)에호소(呼訴)하였다. 범인김정완(金正完),한규찬(韓圭 伍 )이란 자는 본래 읍속(邑屬)을지낸자로써완강(頑强)히버티며불응하 니군부(郡府)에서도결단을내리지못하였다.할수없 이 경사(京司)에 제소(提訴)했다. 1897년(정유)봄에는 법부(法部)로부터 진주부(晋州府)에 훈령(訓令)을 띄 었다.진주부에서는산청군(山淸郡)서상무(徐相 )에 게 업무를 전담시키고 진상을 조사하여 보고토록 하였 다.이렇게관력(官力)으로밀고나가며법으로다스리니 하룻강아지범무서운줄모르고우쭐대었던저들이감 히어떻게불복하지않을수있으랴?마침내굴복하고말 았으니몰래투장했다가파낸것이20여총(餘塚)이요강 제로점령했다가되돌려받은것이오개산록(五個山麓) 이다.사산국내도다시찾고투장했던묘도깨끗이파내 니얼마나속이시원하고통쾌한지모르겠다. 그 당시 입안문(立案文)인 경상남도재판관입안 문(慶尙南道裁判官立案文)살펴보면, 【입안은 함양군 남사금동 사산국내는 함양박씨 시 조상서공의 묘소사패지지라 그 풍의(風儀) 묵직함이 천재(千載)에빛나고그 후손들의번영(繁榮)함이팔 역(八域)에퍼졌으니마땅히수호함에어려움이없을 터인데어찌무엄한무리가몰래팔아먹고암매장하는 등그변을범했던가?그자손들이경사(京司)와부읍 (府邑)에달려가호소했다.경사에서사관(査官)을정 하여지형과진상을조사하여보고하라는지령(指令) 을 받았기에 즉시 산청군수로 하여금 지형과 진상을 조사하고 상세히 보고토록 지시하니 그 단서(端緖)의 내용을 보니 그자들의 모범(冒犯)한 죄상이 소상히 들 어나게 되었다. 용서할 여지가 없는지라 범인들에게 엄중히독촉하여파묘하여옮기도록해당군(郡)에지 령한바 있었다. 이제 상사(狀辭)의 내용을 보면 김정 완과 한규찬이 몰래 설치한 무덤은 이미 파묘하고 옮 겼다고 하니 그만하면 그 자손들의 설분신원(雪憤伸 寃:분함을씻고원한을풀다)은되리라생각된다.범인 들은 무덤을 파냈다고 하여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 고 남아있으니 해당 郡에 지령하여 범인들을 엄벌에 처하도록 할 것이고 차후에는 사관이 보고한 지형에 따라 사산을 둘러 한계를 명백히 해놓고 영원히 수호 토록하여라】 그 당시 公이 서둘러 산송(山訟)을 하지 않았다면 시조공의사패지지사산국내는아주빼앗기고말았을 것이다.공의 지대한 공로를 후손들은 잊지 말고 교육 시켜야할것이다.또한,공이임실군수로있으면서함 양안의에공의18대조호부상서공휘원렴(元廉)과17 대조부사공휘덕상(德祥)등양대(兩代)묘소가있는 데그전에는무환당공휘대립(大立)이경상도관찰사 로재직할때 설치했던석물(石物)들이풍우(風雨)에 마모되어 자구를 알아보기 어려우니 개비(改碑)하고 위토(位土)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공은 위선사업 (爲先事業)에 지극정성으로 발 벗고 나서 문제를 해결 하고수호하는데노력을아끼지않았다. 구당공종가로장남동익(東翼)을입후(入後)시키기위 해공도함께출계(出系)하면서대소가(大小家)집안들을 데리고오래살아정든평산땅을떠나부여곡부(扶餘曲 阜)로이사를갔다.지금으로부터120년전의일이다. 그 동네 터는 풍수지리에서 매화낙지형(梅花落地형 (形))라고불리어오던터이다.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이란매화가떨어지면그향내가사방에퍼지므로명성 과인망이높은자손들이태어난다고하여명당(明堂)이 라고한다.그래서공이탐이났는지모르겠지만거기에 자리를잡고이삿짐을풀어놓았다.한운야학[閑雲野鶴: ‘한가로이떠도는구름과들에노니는학(鶴),아무매인 데 없는 한가(閑暇)로운 생활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 는 경지(境地)를 이르는 말)]을 벗 삼으며 음풍영월(吟 風 잡 月:맑은바람과밝은달을대상으로시를짓고흥취 를자아내어즐겁게놂)소요자적(逍遙自適)하면서여 생(餘生)을보냈다. 혼자 길을 걸으며 들꽃과 나무, 물 과바람,구름과새를벗삼아때로는사색하고때로는 무념무상으로,흙을밟으며걷고또길을걷는게좋았 을 것이다. 도가의 물외인(物外人)의 경지를 꿈꾸며 소요자적(逍遙自適)의 원(願)을 심중에 담다가 1908 년(순종원년정미)정월6일에세상을하직(下直)하니 향년60세이다.우선부여(扶餘)에서장사지냈다가평 산 멸악산(平山滅惡山)에 면례(緬禮)했다. 12년만이 라고하는데시신은그대로였다한다. 선생의 생애와 관련하여 특기할 사항은 그가 유배 또는 관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일기를 남겼 다는점이다.면천군수로부임한기간은1894년10월13 일이후이듬해6월20일까지약9개월.븮면불일기븯는이 기간대부분을포함하는1894년11월12일이래이듬해 7월21일까지276일동안하루도빠짐없이일기를기록 하였다. 당연히 이 일기에는 군수로서 그의 행적이 아 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를 보면 그가 처리했던 지 방행정은 유학자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였다. 한데 이 런행적을훑다보면평소의소신과는전연다른면모 가 곳곳에서 드러나기도 한다.관우 사당 건립과 불교 를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보는 그였지만 면천군수 재임시절무려7번에이르는기우제를지냈고전염병 이 돌자 평소 친분이 있던 영탑사 해월(海月)스님을 모셔돌림병퇴치를기원하는의식을치르기도했다. 그의 일기를분석한청운대김경수교수는이런행 위를통해뷺숭유억불의국시를준수해야하는공직자 의 자세를 떠나 수령으로서 목민에 우선 가치를 두었 음을이해할수있다뷻고평가했다. 또다른 유일본인갑오군정실기는1894년(고종 20)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의정부에서 9월22일 양호 순무사(兩湖巡撫使)로 임명한 일을 필두로 남원부사 이용헌(李龍憲), 함흥현감 박시순(朴始淳)을 초모사 (召募使)로차출하는등의군정에정리한기록이남아 있어농민운동사를연구하는데크게기여하고있다. 일제합방전임실군수를역임하면서한말관인박시순 일기를남겨지방조직및한말지방관청의행정상황을연 구할수있는자료를남긴승지공은함양박씨시조할아버 지의묘역을산송을통하여정리하신업적으로함양시조 상서공신도비각내에조그마한비석하나가서있는데정유 대종회기실비(丁酉大宗會紀實碑) 이다. 이분의 노력이 참으로 많았음을 비에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기 산송의 어려움에서 느끼리라 믿어 바라 맞이하며 우리 종인들 의현세태의조금씩양보하는미덕을기려봅니다. 사금동 산송은 임실군수 공이 주도적으로 종친의 협 력 덕분에 승소할 수 있었다. 특히 공이 자신의 직위를 적 극내세워산송에임할수있었던배경으로서울·경기지 역에서활동한先代의관력(官歷),혼맥(婚脈)등이주요 하게작용했을것이다.최근공이세세하게기록한일기 를통해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호서(湖西)지역고문서 의현황을점검하고이를이용해지역연구를시도한공 동연구서인븮호서지방의고문서븯를최근펴냈고.당진시 는면천읍성복원사업에공의일기를토대로60%정도진 행하고있으며,향토사복원과연구를위한귀중한자료 로평가받는다.끝으로승지공이기록으로남긴많은일 기와 소지류들이 좀 더 체계적으로 분석되고 연구되어 학술대회를통해많은논문들이발표되었으면한다. /글=함양박씨종사연구위원장박성호 한말관인박시순일기저자박시순선 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가계와생애 선생이남긴일기,이를묶어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韓末官人朴始淳日記’로발간하였다. 양요정,전북임실군운암면입석리490-3.1592년(선조25)에양요당최응숙이세운누각으로전라 북도문화재자료제137호이다.양요정은원래요산공원동쪽산의아래에있는강가에있었는데196 5년섬진강댐을준공하면서지금의자리로옮겼다. 산송을제기하여시조상사공의사패 지지를되찾은일화를기념하여세운정유대종회기실비(丁 酉大宗會紀實碑)를영명재경내에서신도비각으로이건하면서후손들이기념촬영을하고있다. 양요정기(兩樂亭記). 1894년(丁酉,광무2) 박시순 선생이 기 문을지었다. 양요정동유록, 양요정에서뜻을같이한사람들이시를짓고는 양요정동유록(同遊錄)이란편액을붙였는데, 여기에는임실군 수박시순,사인(士人)이동의,전주사(前主事)이현구,사인최현 익,사인최봉조,전참봉이현의,진사이병의,사인최봉기,사인 최봉길9명의명단이기록되어있다. 정 유대종회기실비(丁 酉大宗會紀實碑) 역사적배경과관료생활 선조에대한열정적위선사업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