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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3월31일 월요일 12 (제219호) 기획 만사(輓詞)는죽은사람을애도하는글을지칭하는것으로만장(輓章)이라고도한다.만(輓)이란앞에서끈다는뜻으로 상여가떠날때만장을앞세워장지로 향한다는뜻에서만장이라고부르며,망인이살았을때의공덕을기려좋은곳으로갈것을인도하게한다는뜻도담 겨있다.한강정구선생을비롯한서사 원,최산립,안희,손처눌,정사호,리규문,김원,송광계,이언영,이심민,이윤우,강수,권계,이정현,허길선생등16인 이총관공의죽음을애도하며보낸만사 가2013년가을성주군수륜면에있던총관박충후선생묘소를하빈묘골로이장할때 무덤속에서출토되어학계의 비상한관심이쏠렸고,2023년11월5일 에방영된KBS‘TV쇼진품명품’제1397회에출토된만사가공개되어세상의관심을받게된바있다.그리고지난2월 20일달성군문화원에서는‘출토만사의 문화유산가치’의주제로학술발표회가있어이번호에서는총관박충우선생의생애와출토만사의문화유산가치, 조선시대상장례문화와만사등을학술 발표자료를빌어소개해본다. 박충후 선생은 사육신 박팽년의 5대손이다. 자는 경술(景述)이다.아버지의諱는계창(繼昌),증숭정 대부판돈령부사兼판의금부사行장사랑소격서참 봉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인천이씨(仁川李氏) 로 어모장군 諱 건( 괜 )의따님이다.1552년(명종7)4 월 9일 태어났다. 일찍이 충현의 후손으로 음사(蔭 仕)하여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 함창현감을 지 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려고 대구 유진장(留鎭將)을 지냈고, 동생 박충윤(朴忠胤)과 함께 창의 활동에 나섰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 급제했다. 이후 태안군수, 함안군수를 거쳐 동지중 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1611년(광 해군 3) 2월 21일에 돌아갔고, 동년 5월 3일 낙동강 오른편 성주 지족산 해좌 사향(亥坐巳向,현 성주군 선남면용신리,옛신기리)에안장되었다. 먼저하빈박충후가소유했던가산은어느정도인 지에 대해 알아본다. 결론부터 도출하자면 가산이 넉넉했다.박충후의가산은하빈묘골의입향조인조 부박일산으로부터나왔다.박일산은후손이없는외 가 성주 이씨의 가산을 물려받았다.1479년(성종 10) 에하빈묘골에별당太古亭을비롯한종택99칸을지 었다.하빈묘골은순천박씨충정공파의입향지이다. 선비들이 지은 만사에서 박충후의 가산이 넉넉했 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이정현이 지은 박충후 만 사에서는 ‘가치천금산유여(家致千金産有餘, 천금 쌓은가산은넉넉하구려)’라고했고,권계가지은박 충후만사에서는‘복향인간옥윤화(福享人間屋潤華, 복 누린 인간 세상에 가옥 윤택하며)’라고 하는 등 넉넉한가산을가졌음을보여주고있다. 1592년(선조 25) 5월에 박충후의 가옥이 일본군의 침탈로소실되는참상을입었다.동월에서사원은강택 (姜澤)이보낸서찰에박충후가옥이모두소실되었다 는 소식을 적어놓았다. 이때 소실되지 않은 건 물은 박팽년 사당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윤두 수(尹斗壽)가 대구 하빈 을 지나가다 박팽년 사 당을참배하며지은<과 대구박참판사당(過大 丘朴參判祠堂)>이있다. 즉,난리뒤에인가가백 채도 못 되는데 산자락 에 박팽년 사당 몇 칸만 남아 있었다. 하늘이 보 우하여 신명이 일본군 의 방화에서 피할 수 있 었다. 윤두수의 시는 태 고정 대청에도 현판으 로 걸려 있다. 박씨 집안 에도 이와 관련된 말이 전해온다. 임진왜란 때 박충후의 가옥은 모두 불에 탔으나 박팽년 사 당만 유독 보존되었다. 혹자가 전하기를 일본 군이 사당에 불을 지를 수가 없었다고 했다.≪ 六先生遺稿≫ 그런데 하나 흥미로 운 사실은 당시 박충후 의 가옥이 전란으로 소 실되는 화를 입었지만, 집안의 재산 사정은 여 전히 넉넉하였다는 점 이다.이러한사실은≪ 낙 재 선 생 일 기 ≫ 에 서 확인할수있다.박충후 가옥이화를입은몇달 후인 10월에 서사원은 박충후의 초청으로 소 재지 미상의 박충후 집 에 가서 다른 일행과 함 께 투숙하였다. 1593년 (선조 26) 11월과 12월 에 서사원이 각각 하빈 巴 銷 (巴畏)에 소재한 박충후의 집에 갔다고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박충후의 가옥은 전란 으로 피화를 입은 묘골 외에 파외에도 한 채가 더있었던것으로보인다. 하빈파외는오늘날파회(巴回)마을을지칭한다. 파회는 산줄기가 ‘巴’자 형상으로 마을을 감싸 돌고 있는 데에서 붙여졌다. 파회와 묘골의 지세를 공중 에서보면사면대부분이용산(龍山)줄기로둘러싸 여 있고,오직 남동쪽의 한구석만 뚫려 있다.입구에 서 본다면 낮은 산을 경계로 왼편이 파회이고, 오른 편이 묘골이다.마을은 낙동강가에 있으면서도 강이 보이지않고,들판을끼고있으면서도들판이보이지 않는다. 또 밖에서 보면 안에 인가가 있는지를 쉬이 눈치챌 수 없고,안에서도 맘대로 밖을 내다볼 수 없 다.그래서예로부터回龍顧尾形명당으로꼽혔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초기에 일본군이 빠른 속도로 대구지역으로쳐들어오자,평화로운시기에시행되 었던모든제도가한순간에무너지는현상이나타났 다. 관군은 일시에 허물어져 흩어졌고, 관아는 불타 거나 털렸으며, 심지어 일부 수령은 도망치는 일도 발생했다.특히민초들은생명을부지하고자허둥지 둥 짐을 챙겨 집을 떠나 이리저리 숨어들어야만 했 다. 민초들은 피난 도중에 양식이 떨어져 목숨을 부 지하기가무척어려웠다. 또 대구와 인근 지역의 선비들은 구국의 이념을 바탕으로자발적으로창의활동을전개하였다.이들 은 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맞설 군 사 조직을 만들었다. 군병의 활약은 일본군의 침탈 행위를저지시키는데에적지않은전과를거두었지 만, 군병 조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여러 문제를 맞닥뜨려야만 했다. 일본군과 싸울 전 투 능력의 제고도 문제였지만, 그 무엇보다도 조직 에 반드시 필요한 군량과 보급품 조달은 커다란 난 제였다. 이때박충후는자신이가지고있는넉넉한가산을 아낌없이군병조직이나사회공동체를위해널리베 풀었다. 이심민이 지은 박충후 만사에서는 ‘아부영 도로, 산시능진구(餓莩盈道路, 散施能賑救, 굶주린 이가 도로에 가득하자,사재 털어 구휼하였다오)’라 고 했다. 당시 전란으로 굶주린 민초들이 도로를 메 우자,박충후가사재를털어이들을구휼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했 다. 전국의 뜻있는 선비들은 분분히 구국의 일념으 로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하는 군사 조직을 만들었 다. 이들은 한마음으로 화합하여 일본군과 대항할 의병과 산졸들을 초집하고, 또한 군기와 군량을 마 련해서 각 지역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박 충우선생은아우박충윤과함께의병을일으켰다. 동년 7월 6일에 대구와 인근 지역의 의병장들은 팔공산에서 모여 향병, 즉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 을조직하고각지역별로이끌장수와유사를지정한 향병장유사분정기(鄕兵將有司分定記)를 작성했다. 서사원은향병대장을 맡고,박충윤은 하빈북면장을 맡았다. 또동년7월19일에대구와인근지역의의병 장은군사조직을만들고민초들에게기의할것을권 유하는 포고문을 작성했다.훈련봉사 최계는 대구가 장을맡고,전현감박충후는유사(有司)를맡았다. 1594년(선조 27) 정월 10일에 경상도관찰사 한효 순이조정에올린장계에는임진년부터당시까지전 과를 거둔 사항을 열거해놓았다. 대구 하빈 의병장 박충후가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을 야간에 급습하여 적병을참획한수급이전후1백여명이나달했고,경 상좌도 의병 가운데 전공이 가장 뛰어났다. 이것으 로 봐서 박충후가 하빈 의병을 거느리고 대구부를 드나들며많은적군을참획하는큰전과를거두었음 을 알 수 있다. 1593년(선조 26) 9월에 박충후는 창녕을 지키는 가수령(假守令)에 임명되었고, 10월에 창녕 가수령 의 신분으로 서사원을 찾아가 만났다. 얼마 후 창녕 가수령에서 물러났다.1594년(선조 27)정월에 박충 후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방백과 장수들에게문무인재를천거하여장수로삼도록명 하였다.도원수권률은박충후와박진영을천거하여 과거에 나서게 하였다. 곧이어 박충후는 궁궐에 들 어가숙위장수가되었다.1596년(선조29)에통정대 부에올랐다. 1596년(선조 29) 3월에 도체찰사 류성룡, 체찰사 리원익이 주도한 팔공산회맹이 이루어졌다.각지에 서 활동한 의병장들을 불러 모아 상호 간의 유대감 을 높이고 향후 관군과 긴밀한 협동 작전을 펼쳐 일 본군들을 물리치기 위해 회맹을 거행했다. 이때 박 충후, 박충윤 형제가 참여했다. 동년 9월에 또 한 차 례팔공산회맹이이루어졌다.이번팔공산회맹은지 난 3월 관이 주도한 팔공산회맹과 달리 인근 지역의 의병장들이자발적으로모여항쟁의지를다졌다.이 때에도박충후,박충윤형제가참여했다. 1597년(선조 30) 7월에 박충후, 박충윤은 방어사 곽재우를따라화왕산성방어에나섰다.동년9월에 의병, 관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팔공산전투가 펼 쳐졌다.경주 의병장 이눌이 총상을 입어 부득불 고 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눌과 함께 전장에서 생 사를 같이한 박충윤은 이눌의 늠름한 기상을 칭송 하고 부상에서 빨리 치유하기를 기원하는 시를 지 어주었다. 1605년(선조38)4월에박충후,박충윤은조정으로부 터 임진왜란 때 세운 공적을 인정받아 ≪宣武原從功臣 錄券≫을받았다.이정현이지은 박충후 만사에서“위 주공심수철권(爲主功深垂鐵券, 군주 위해 세운 큰 공 은 鐵券 내려졌고)”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하지만박충후는임진왜란때소중한가족을잃어 버리는 비통함을 맛보았다. 1592년(선조 25) 5월 18 일에 서사원은 姜澤이 보낸 서찰을 보고 하빈 박충 후 집안이 일본군에 의해 참상을 입었던 사실을 알 았다. 박충후의 두 딸은 일본군의 겁탈을 피해 절개 를 지키고자 낙동강에 투신하였고, 두 첩은 일본군 에사로잡혔으며살던집은불에탔다고했다. 박충후의두딸이행한절개사적은정탁(鄭琢)의 ≪용화잡록, 龍蛇雜錄≫ <효자열녀질,孝子烈女秩> 과 1617년(광해군 9)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 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이부투강,二婦投江> 에 수록되었다. 정유재란 때 명 정응태가 조선이 요 동을차지하기위해일본군을끌어들여전쟁을일으 켰다며 무고 주본을 올리자, 조선 조정은 이것을 변 무하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명 조정이 파견한 서 관란을 비롯한 감찰 관원과 접반사 일행이 하빈의 박충후저택에들어서자,박충후는부지런히그들을 마중하고예로써접대하였다.이러한박충후의노력 은 장차 서관란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나중에 서 관란이조선조정의무고함을변무하는데일조하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올 랐다.(이상 순천향대학교 중국학과 박현규 교수의 임진왜란시기하빈박충후의창의활동에서) 박충후 선생의 묘에서 출토된 만사를 한 인사와 그 내용은 사육신중의 유일한 현손, 넉넉한 삶으로 베푼 애민, 임진왜란에서의 활동 등을 나타내고 있 어정리해보면다음과같다. 첫째, 박충후에게 한 만사에는 대체로 그가 사육 신의 후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육신의 후예가묘동에정착한이후박충후형제대(代)에이 르러널리알려졌던것을알수있다. 둘째로, 박충후가 음보로 관직에 진출한 후 함창 현감, 태안군수, 함안군수 등을 역임하고 동지중추 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의 2품인 고관에 오른 것을 말하고 있다.그러한 가운데 가는 곳 마다 그의 능력을 인정 받았다는것을언급하고있다. 셋째,임진왜란때의전공과관리로재임할때백성 들을구제한것을말하고있다. 넷째,박충후가재력을많이모아많은사람들에게베 풀었으며,형제들을속환한것에대하여말하고있다. 다섯째, 박충후가 교유한 사람으로는 향리의 우 인,선배,후배 그리고 인근지역의 관리와 한양의 고 관들과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상 사단법인대구학회장구본욱의‘총관박충후만사의 해제와교유’에서) ‘박충후 만사’는 조선시대 상장례의 한 부분인 만 사문화를잘보여주는실증자료이다.문화유산이가 진탁월한보편적가치(OUV)는무엇보다도객관적 인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더불어 역사적, 학술 적 가치가 확인되어야 하며, 진정성과 완전성이 담 보되어야한다. 여기서는 ‘박충후 만사’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에 서진정성과완전성(보존상태)을검토하고,이를바 탕으로역사적,학술적가치를살피고자한다. 1)문화유산으로서 진정성,완전성을 갖춘 만사로 서역사적가치가탁월하다. ‘박충후 만사’는 조선시대 상장례의 발인용구 중 하나이다.븮사례편람븯에서전하고있는‘만사도’의구 체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으며, 제작시기와 작자가 분명하다. 또 당대 묘제의 하나인 회곽묘에서 미라 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회곽묘의 보존환경에 힘입 어 400여 년이 흘렀음에도 실물자료로서 전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1611년의 제작시기와 16점 의 작성자가 문헌 기록에 전하는 인물이어서 진정 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다만 학술적 조사에 의해 수습되지 않아 구체적인 도면과 기록이 없으나 묘 소의 위치가 파악되고 후손들에 의한 이장 과정에 수습되었으므로사실상진정성을유지한것으로인 정할수있다. ‘박충후 만사’ 16점은 총관 박충후(1552~1611) 묘 에서 출토되었음이 확실하고 회곽묘의 목관 상부에 부장된것으로서일괄유물로전량수습되었다.만사 의제작시기와작성자가확실하고만사의원상이유 지되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후손들이 수 습 후 건조와 보관관리에 유의하여 문화유산으로서 보존·보호가 유지되고 있으므로 16점의 만사는 일 괄유물로서완전성을갖추고있다. 이상의 진정성과 완전성의 검토를 통해 ‘박충후 만사’가 문화유산으로서 기본 조건을 충족하고 있 으며, 400여 년 전 조선시대의 상장례 중 만사문화 를 전해주고 있다. 이처럼 제작시기와 공간적으로 대구와 인근 지역의 사실임을 명확히 전해주고 있 어 대구지역의 학맥과 문화교류의 실태 파악, 그리 고 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역 사적가치가탁월하다. 2)조선시대 상장례 중 만사문화 연구의 실증자료 로서학술적가치가높다. 조선시대의 일상생활은 유교문화의 근본을 따르 고 있으며, 관혼상제는 븮주자가례(朱子家禮)븯에 따 라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븮사 례편람븯에는 만사의 기초자료로서 만사도(挽詞圖) 가제시되어있다. 총관 박충후 묘에서 출토된 만사 16점은 만사의 표준형식인 깃대에매다는방식의Ⅰ류형으로서구 성과제작방식의원형을보여주고있다,또세부적으 로형식을달리하는양상도보여주고있어서당시만 사지의제작과유통에관한사실도유추할수있다. 만사의 재질은 한지이고 한지 2매를 잇대어 만들 었다. 형태는 븮사례편람븯의 만사도와 같이 세장방형 으로 길쭉하다. 만사의 구성은 중간에 뇌문으로 둘 린 만사작성부분이있고 상,하단에 연잎과연꽃 문 양을 배치하였다. 만사의 문양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3형식으로구분되며,이는동시기타만사자료 에서도유사한양상을보여주고있어주목된다. 한편, 근대 이후 만들어진 만사 자료를 살펴보면 여기에는 상, 하단의 연꽃 문양이 다른 그림으로 대 체되거나 그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만사 중 장방형의 종이로 남겨진 만사는 상장례 용구가 아니라 만사글 또는 만시를 적은 것 으로서이를후일에만사첩으로만들거나문집에수 록하기도한다. 이처럼 ‘박충후 만사’는 만사도에 전하는 조선시 대 만사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선시 대(중기)만사의구성과제작방식등만사문화를밝 힐수있는실증자료이기에학술적가치가높다. 3)만사작성자친필의희소성에의한보존가치가 있다. ‘박충후 만사’의 작성자는 임진왜란 시기에 대구 와인근지역에서유학자로활동한분들로서,모두1 6인이다.한강 정구,낙재 서사원,석담 이윤우,모당 손처눌 등 이들 유학자가 남긴 친필 만사는 드물다. 당대에 작성한 시문이나 만사와 제문 등은 그 내용 이 문집에 전해지고 있지만, 친필이 전하는 경우는 드물어 ‘박충후 만사’에 남긴 친필은 소중한 자료이 다.실제로한강정구선생의경우에도남긴친필원 본은알려진자료가없는것으로파악되나확실하지 는않다. 이번에 ‘박충후 만사’에 남겨진 친필 원본은 해당 유학자의 글씨를 살펴볼 수 있어 대구와 인근 지역 의유교문화를살피고알리는데유용한문화유산이 다.그러므로 만사 작성자인 한강 정구 선생 등 대구 지역 유학자의 친필본으로 인정되는 ‘박충후 만사’ 는희소성에의한보존가치가있다. 한편,‘박충후만사’의작성자와내용을볼때1,600 년경 대구와 인근 지역의 교유관계를 살펴볼 수 있 어 당대 유림의 사회활동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점도 중요한사실이다.이점에대해서는앞서구본욱(202 0)에 의해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부언을 생략한다. (이상박승규가야문물연구원) 달성문화원에서 개최된 이번 학술대회에서 대회 를 주관한 순천박씨 충정공파종친회 박성규 회장은 사육신중유일하게후손이이어지는문중으로이번 출토된 만사는 그를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 문 화재적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달성문화원 백상천 원장, 달성군의회 김은영 의장 등은 이날 축사를 통해 출토된 16점의 만사는 보존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에 가 야문물연구원 박승규 님의 ‘총관 박충후 묘 출토 만 사의 문화유산 가치’ 논문 맺음말을 덧붙여 마무리 하고자한다. 『‘박충후 만사’는 1611년 봄에 제작되어 총관공 박 충후 묘에 부장되었으며, 400여 년 후에 후손들의 이 장하는 과정에 출토되었다.그 후 2023년에 KBS ‘TV 쇼진품명품’에공개되어세상의주목을받게되었다. 만사(挽詞)/만장(挽章)은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 은글로서그글을비단이나종이에적어기(旗)처럼 만든 것이다. 오늘날 장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유림이나 불교, 천도교 등의 의례에만 간혹 전해지고있다. ‘박충후 만사’는 조선시대 만사의 전형을 유지하고 있으며,후손들의 노력으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잘 보전하고 있다. 이들 만사는 조선시대 중기의 상 장례에서보이는만사문화를고증할수있는중요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박충후 만사’는 대구지역의 대 유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의 친필을 실견할 수 있어 문화유산의 가치가 더욱돋보인다. 오늘의 학술대회를 통해 ‘박충후 만사’의 문화유 산가치를널리알리고,대구광역시유형문화유산으 로 지정되어 우리나라의 만사 문화 연구 및 대구지 역의향토사연구에큰공헌이있기를소망한다.』 총관박충우선생과 묘 출토만사의 문 화유산가치 선조 유지를찾아븣 박충후선생의생애 사진KBS‘TV쇼진품명품’제1397회화면캡쳐. 박 충후선생묘소(이장전,성주수륜면) 학술대회에참여한발표자를비롯관계자들이기념촬영을하고있다. 한강 정구선생 만사 憶年初相 見(예전의 첫 만남 돌이켜보 니)依然五十年(의연히 50년이 나되었네)當時君總角(당시그 대는 총각이오)今日我華顚(오 늘 나는 흰머리일세)先正成仁 懿(선대는아름다운어짐을이 루었고) 吾生仰德偏(내 평생 유달리덕을받들었다오)家孫 嗟又逝(아아 그 집 손자 또 떠 나가니)興感悼無緣(까닭 없이 슬픈 감정 솟구칠 뿐)西原 鄭 逑 拜挽(西原 鄭逑가 만사 지 으며절하옵니다.) 넉넉한가산과공익베풂 군사활동과집안피화 출토만사의해제(解題) 박충후만사의문화유산가치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