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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8월31일 화요일 12 (제176호) 기획 8월15일은광복제76주년을맞이하는날이다.수많은애국지사들이목숨을초개와같이버리고맞은광복이 다.애국지사들이정당하게대우받고그 후 손들에대한처우가개선되어야함에도작금의현실은그렇지못한것같다.정치·사상적이념으로대립되어정 당한평가를받지못한것또한사실이다. 대한광복단박장호도총재는화서이항로(李恒老),1792~1868),중암김평묵(金平默,1819~1888),성재유중교 (柳重敎)선생등당대의명현성리학자문 인으로그문하에서위정척사(衛正斥邪,정학을지키고이단인사학을배척하는유교의이념을대변하는사상 )정신이체질화된선비이다.날로국운이 기울어져가는현실을목도하고을사늑약이후국권을빼앗긴조선의독립을위해강원홍천에서의병을일으 켜관동의병의영도자로활동하였고,일본 군이대폭증강되자만주로가대한독립단을결성도총재로독립운동을지휘하다1922년4월2일일제의밀정 김헌(金憲,啓南天乙)에게피격되어서거, 1962년건국공로훈장단장(제54호,현건국훈장독립장)을추서(追敍)했다. 후손들은 만주에서 생활하다 국내에 들어와 궁핍한 삶과 국내에서 학업을 성취하지 못해 가짜 후손에 의해 유 공자 가족 예우마저 못 받다 정직한 학자 정삼현선생의피나는노력으로후손의지위를되찾고출생지가평군에서의현창사업등이활발히진행되고 있어다행스러운일이아닐수없다. 관동의병장, 홍천의병장, 대한독립단 도총재로 기록되는 박장호(1850~1922)의 자는 양직(養 直),호는 화남(華南)인데 철종 원년(庚戌)6월 2 2일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화양동(華陽洞) 에서 부친 외 헌공(畏軒公) 휘 기우( 덤祐) 와 어 머 니 단 양우씨 사이에 서 장 남 으 로 태어났다. 화남공은 밀 성대군의 후예 충헌공(휘 척) 의 23세손인 데, 성균관 진 사 ( 成 均 館 進 士 )로 고 려 말 의 정 치 적 인 혼 란 을 보 고 성 절 사 ( 聖 節 使)로 중국에 들어가 산남염 방사([山南廉 訪司)의 직책 을 얻 어 경 사 를 왕 래 하 고 , 글을 써서 자 손들에게 경계 하기를 벼슬하 지 말 라 하 고 는 고 려 로 돌 아 오 지 않 고 중국에서 돌아 가 시 자 남 긴 옷 과 관 으 로 장 사 를 지 낸 휘 소양(昭陽) 이 중시조인데 화남공은 18世 종손이다. 고조부 휘 준(峻)은 성균생원, 증조부의 호는 죽재(竹 齋), 휘 초섭(楚燮)으로 시강원 세자사부로 학문 이 뛰어나 8권의 저서를 남겼으며,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1761년(영조37) 9월 16일에 태어난 죽재 공은 양주에서 살다가 북면 이곡리 화양동(현 북 면 이곡1리572번지)으로 이주하여 가평 입향조 가된다.조부의휘는명재(命載)이다. 화남공은 진주강씨 도정 의혁(義赫)의 따님과 결혼하여 일남삼녀를 두었다. 아들은 필보(弼輔) 이고 딸 셋은 경주이씨 채영,해주최씨 두완,창녕 성씨낙용에게출가하였다. 아들 필보(弼輔, 1892~1966)는 병항(丙恒)이 라고도 하는데 자는 자승(子昇)으로 고종 29년 (壬辰) 8월 4일에 태어났다. 전주이씨 유범(幼 凡)의 딸 삼용(三龍)과 혼인하여 7남을 두었는데 정훈(正勳), 기훈(起勳), 경훈(璟勳), 동훈(東 勳),명훈(明勳),광훈(光勳),춘훈(春勳)이다. 화남 박장호 도총재는 홍천군 서석면 생곡리에 잠시 거주하였다.이러한 사실은 1902년 2월 24일 별세한 부인 진주강씨의 묘가 서석면 하군두리에 있고, 1903년 작성된 ‘강수계수성록(講修契修成 錄)’에 화남의 주소가 서석면 생곡리로 표기되어 있는사실로알수있다. 화서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중암 김평묵 (金平默,1819~1888),성재 유중교(柳重敎,1832~ 1893)선생 등 세 문하에서 위정척사 정신이 체질 화 된 화남 박장호는 날로 국운이 기울어 가고 서 교(西敎=천주교)의 전파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 략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1876년 일제의 강압 에 굴복하여 맺게 되는 병자조약의 부당함을 지 적하여 동문인 유인석·홍재학·유기일 등과 같이 반대 상소를 올리고 1881년에는 개화를 내세워 일본과 협잡하여 친일 주구가 되는 개화당 무리 들의친일정책을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 여 1906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에서 맨 먼저 의 병을 일으켜 관동의병의 영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화남 박장호를 ‘관동의병대장’, 혹은 ‘홍천의병장’으로기록하기도하였다. 1907년 12월에는 종사 두 명을 데리고 운강 이 강년(李康秊, 1858~1908) 의진을 방문하고 전투 방략을 의논하였으며 눈으로 덮이고 빙판이 심한 부항(缶項)을 넘어 서석 생곡리에 이르러 점심을 함께 하였다. 화남은 운강과 함께 다시 행군하여 도찬(道贊) 주점에 이르러 7일 골운 일남현에서 운강과만나기로하고헤어졌다. 화남은 운강과 함께 서울로 진격하여 이등박문 (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과 싸워 결판내자고 이 미 약속하였던 것이다. 화남은 얼어붙은 일남강 빙 판을 건너 지겸(止謙)에서 조반을 먹고 홍적령(洪 狄嶺)을넘어광악리에서운강과만나게된다. 두 의병 장은 손을 굳게 잡 고 “우리 나라 우리 백성 의 원수 인 왜놈 의 수괴 이 등박 문과 한 판 승부 를 겨 루어 하늘의 심판을 받자”고 맹서하였다.그리고는 두 장수는 8일 광악령에 올랐다. 깎아지른 듯한 벼 랑과 험 악하 고 가파 른 산에 눈 은 쌓이 고 수목 이 하 늘을가리고있었다.군사들은험악한산을타고 대 청동에이르러진을치고주둔하였다. 이 들 은 여 기 서 일 본 군 과 싸 우 면 서 3 월 달 을 보 내게 된다. 서울 진격을 시도하며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화남 박장호는 긴급한 임무를 띠 고 종사 김진흥을 대동하고 조종(朝宗)으로 향하 였다. 그러나 운강 이강년이 적과 대치하고 있다 는 소식을 듣고 다시 조종으로 가는 길에서 돌아 와 오무동(烏舞洞)에 주둔하였다. 한편 가평 주 길리에서 패배한 외당 유홍석은 잔여병력을 김노 수에게 맡기고 박장호와 합류했다. 이운강과 박 화남은 때로는 의암 유인석이 보낸 편지를 놓고 시문의 의리와 나라를 걱정하기 하였다. 이렇게 박화남은 운강과 유격전을 펼치며 전공을 세우다 가 4월 2일 낭천(浪川, 화천)에서 운강과 작별하 고북상하여황해도까지진격하였다. 화남의 우국우도(憂國憂道)에 대하여는 동문 인 의암 유인석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 에잘나타나있다. 『 박장 호가 일찍 이 화서 중 암 성재 세 분 선생 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여 우국우도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으나 끝내 나라가 오랑캐(倭)에게 먹혔 는데 다 시 일으 키지 못 하고 우 리 도가 사 교에 침 식 되었는데도 구하여 유지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므 로사우들과더불어뜻을모아힘을다하여성묘(聖 廟)를 수호하고 대의를 강론하여 중동(강원도)의 인심 을 모아 서 이 원통 함을 풀 고자 하 나 도와 줄 분 (유인석)을 기대하고 있다. 이 천지에서 이 근심을 책임 맡 고 짊어 질 자는 우 리 세분 선 생님 에게 서 공 부한사람을제쳐놓고어디서구할수있겠는가』 의암 유인석은 화남이 보낸 이 편지를 두고두 고 보면서 1914년 7월에 답하기를 “형이 이 책임 을 짊어진다면 내가 비록 못나고 병들었지만 죽 기 전에는 힘을 다하여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의암과 화남은 국내에서는 물 론 이국땅 만주에서도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전개하였다. 1910년 나라가 일제하에 강점되고 일군이 대량 으로 증강되자 화남 박장호는 이진용, 조맹선 등 과 휘하 의병을 이끌고 만주로 가서 장백, 무송, 집안, 임강현 등지를 전전하며 국권회복에 전념 하였다. 화남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국내로 부터 오는 청년들이 늘어나자 동년 4월 15일(음 3 월15일) 각지에 산재해 있는 조맹선, 백삼규, 조 병준, 전덕원 등의 의병장과 유림대표, 보약사 대 표 , 농 무 계 대 표 , 포 수 단 대 표 등 5 6 0 여 명 과 더 불 어 유하현 삼원보 서구 대화사에 모여 조직의 단 일화를 기하였다. 이것이 종래의 각 단체별 행동 을 지양하고 단일체제로 통합하여 전열을 가다듬 어 일사불란한 대일(對日) 투쟁(鬪爭)을 전개하 고자 새로 개편한 항일군사조직이다. 이 조직이 바로 단일군사기구인 ‘대한독립단’이다. 화남 박 장호는 대한독립단의 최고 영도자인 도총재에 추 대되어모든업무를통괄지휘하기에이른다. 이때발표된독립선언문은다음과같다.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대한독립운동이여! 주 력(主力)이 그때를 얻고 동기가 그 세력을 승 (乘)한지라, 각단이 합체(合體)하여 만방에 정 (情)을 표하여 국기(國旗)와 특사와 파리평화회 의 공인을 얻음은 전 지구가 우리와 같이 공인을 기울이는데, 아주(亞洲) 한 모퉁이에 홀연히 고 립하여 인도를 무시하는 저 야만 왜놈의 존립이 몇날이나갈까! 국토회복에 배성일전(背成一戰) 하리니, 이 때 에 일적(一適)의 유혈이 족히 국민만세의 영광이 될 지며 일푼(一分)의 금전이 가히 자손만대의 행복이 될지어다. 그런데 슬프다! 우리 동포는 왜 의 품안에 안겨 몸을 어디에 던질지 돈을 무엇에 잘 쓸 지 방 황 주 저 하 니 신 명 의 도 움 이 아 니 면 어 찌 각성할 수 있으랴! 본단(本團)이 이를 민망히 생각한지이에몇달이다. 이제 여러 모의를 종합하여 온 강토가 같은 호 흡에 북은 아령(俄領)으로부터 남은 만주에 이르 도록 수 천리에 걸쳐 의용(義勇)이 운집(雲集)하 고 영웅 준걸이 향응하여 군세가 이미 떨치니 오 직 우리나라의 광복이 바로 금일에 있도다. 내외 전역에 도화선을 일으키기 위하여 단원 특파하여 함악한 곳에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초를 같이 맛보면서 울며 피를 뿜으면서 포고하노니 무릇 우리 동포는 국가의 동량될 청년자제를 한 사람 이라도 앞을 다투어 파송하며 나라 곳간의 원위 (元位)될 금전이란 아끼지 말고 한푼이라도 성심 으로 바쳐 사람과 물자가 후일에 적병에 뒤떨어 지지 않도록 할지어다. 대한민국 원년 4월 15일, 대한독립단도총재부근백』 이렇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대한독립단의 통 칙(通則)을보면다음과같다. 「대한독립단통칙」 1.명칭:대한독립단이라함. 1. 목적하는 일 : 남북만주와 조선내지에 긴말 상 통하여조선독립의완전한성취를도모하는일. 1. 조직 : 대한독립단의 본부를 중국 유하현 삼 원보에 두어서 이를 총재소로 하고 도총재로 박 장호, 부총재로 백삼규를, 총단장으로 조맹선을 임명하고 경성에 건국중앙기관을 두고 각 도에는 총지단,각군각면에는군면지단을설치할일. 1. 방법 : 각 도에 소집전권위원을 특파하여 일 동의전권을급속히위임할일. 1.전권위원의사무는아래와같음. (가)독립운동의모금을중수할일. (나) 만주에 있는 본단에서 동병(動兵)하여 압 록강을건너올때에는일제히내응할일. (다)독립단이개전할때에는군인군속(軍人軍 屬)과군수품을증발하여운수해보낼일. (라) 기타 적병(일본군)과 적국의 경찰관 배치 한 상황과 적국의 간첩(間諜)과 친일하는 관리이 조사표를꾸밀일. (마) 행정관리에 대한 경고문을 본부의 명령으 로 선 포 할 일 . (바) 지방 청년으로 의용단을 조직하여 군(郡) 에는 이병명으로 조직한 중대를 두고, 도에는 사 백명으로 조직한 대대를 두고, 중앙에는 팔백명 으로조직한연대를설치할일. (사)의용단 중에서 용감한 사람을 선발하여 암 살단과 방화대를 조직하여,암살대는 중앙기간의 명령을 받아서 관리와 친일하는 사람을 암살하 고, 방화대는 일이 일어날 때에 경찰서 근처에 불 을 놓아 경관이 소방하러나간 틈을 타서 무기를 탈취하고 경관과 싸우는 동시에 중앙으로부터 대 병(大兵)을 출동시켜 전투를 개시하고 또 각소에 있는 각 감옥을 파괴하야 각처에 있는 죄수를 해 방할 일, 군용품은 물론 철도와 전신을 파괴 절단 할기구를준비하여줄일등이요. 화남 박장호 도총재가 이끄는 대한독립단은 도 총재부와 총단과 남만주 제1사단 각 현에 지단 분 단을 설치하고 국내에도 지단을 설치하는 등 자 못그규모와활동이국권회복의기운이보였다. 그리고 독립단의 인적 구성을 보면 대부분 평 안도 출신들인데, 박문일·박문오의 문인이거나 유인석의 문인으로 화서연원(華西淵源)이 그 주 도세력을이루고있다. 지방조직으로는 전덕원·김승학(金承學)·백의 범(白義範) 등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맹헌규(孟憲奎)·유일우(劉一優)등은 만주 집안현 (集安縣)·장백현(長白縣)등지에서활약하였다. 국내외 모두 100여 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 고,만주지역에는 거류 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 로 하 여 구 관 (區 管 ) 을 두 고 1 0 구 에 단 장 을 두 어 자치행정을실시하도록하였다. 국내의 지단조직은 국내 총지단장에 홍제업 (洪濟業), 평안북도정우범(鄭禹範), 평안남도안 창일(安昌一), 경기도 한덕리(韓悳履), 용천군이 후관(李厚觀), 철산군안병철(安秉哲), 영변군신 태익(申泰翼), 정주군조석균(趙錫均), 태천군백 낙기(白樂基), 영유 이항로(李恒老), 가산 오봉 희(吳鳳熙),수안최일호(崔一浩)등이었다. 만주지방 조직으로는 장백현 총지단장에 유일 우, 집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 최남표(崔南表), 집안현외차구(外플溝)홍승국(洪承國)등이었다. 이들은3,4명씩결사대를조직해평안남북도의조선 총독부 예하 경찰을 습격하고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 금을모금하면서,전국적인조직망을확대시켜갔다. 대한독립단은 출범 직후부터 일본의 방해에 험 난한 가시밭길을 예고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 자금확보인데이또한여의치않았다. 대한독립단에서는 우선 서간도 지역에 거주하 고 있는 동포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 다. 그러나 이러한 군자금의 모집액은 모든 재만 동포들에게 일률적으로 부과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재산의 정도에 따라 그 액수를 달리하였 던 것이다.즉 흥경,동방,칠리,양청변에 있는 독 립단 지부의 경우 가옥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 는 2 5 원 을 , 그 렇 지 않 은 경 우 에 는 1 5 원 을 각 각 징 수하고자하였던것이다. 그런데 대한 독립단의 이러한 군자금 모집의 성과는 시기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3·1 운동 직후부터 동년 5월말까지는 군자금 3만원을 모금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 해서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재만 동포들의 기대 와 3·1운동 직후의 민족의식 고양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수있다. 1919년 6월부터 동년 10월 말까지 대한 독립단 의 군자금 모집 성과는 1차 모금시(1919.4~5.)에 비하면 그 성과가 큰 것이 못되었다. 다만 2만원 을 모금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이것은 대한 독립 단이 무기의 구입과 독립군 양성등에서 멀어져 갔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틈을 이용하여 일제 가 애국회(愛國會), 제우교(濟愚敎), 안민회(安 民會) 등 칠일기관을 조직하여 대한독립단을 탄 압하기에 이른 것이다.1919년 11월부터 1920년 2 월까지 대한독립단은 더욱 고전하였다. 1920년 1 월 14일에는 일제이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들이 대한독립단의 해산을 명령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기대를 걸었던 국제연명회의 역시 무기한 연기되 는등수많은암초에부딪힌것이다. 군자금 모금은 여의치 않은데다 무장투쟁을 지 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에도 어려움 이 있었다. 이에 총단장 조맹선은 합이빈에 주둔한 백계로군사령관 세미노프와 교섭하여 그 부대 안 에 한인청년부를 특설하였다.그리하여 1919년 8월 중순경에는 약 1,500명의 장정이 북만주 지역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백계군은 군사 훈 련을 실 시하 지 않고 장 정들 에게 무 리한 사 역을 실시해 대다수 빠져나가는 등 한인 특설부는 실패 하였고,중로(中露)국경지대인오참(五站)등지에 새로이한인부대를설치하여독립군을양성하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일제의 간섭으로 실패하기에 이 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대한독립단은 조국 광 복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이어갔다. 적극적인 활동 을 전개 하기 위 해 폭약 을 구 입, 관 공서 파괴 를 계획 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 또한, 유일우·김 병연(金秉淵)·박기연(朴基淵)등은장백현일대에 서 많은 자금을 모금했으며,안도(安圖)·무송현 등 지와연락하면서대대적인활동을전개하였다. 그 뒤 연호문제로 노년층과 청년층이 대립하기 도 하였다. 단군기원 또는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 호·백삼규·전덕원·이웅해(李雄海)·김평식 등의 기원독립단과 대한민국 연호사용을 주장한 조병 준·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김승학 등 의 민국독립단으로 분리, 대립했지만, 독립운동 에는상호협력하였다. 1920년 7월 26일 임시정부에서 제정하고 8월 1 일을 시행일로 삼은 「대한광복군참리부규정」, 「대한광복군사령부규정」, 「대한광복군영규정」 에 따라 기원독립단(대한독립단 분파)·민국독립 단(대한독립단 분파)·한족회(韓族會)·대한청년 단연합회 등 단체는 광복군사령부(이칭: 광복군 총영)으로 통합되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대한 독립단의이름아래투쟁하였다 화남 박선생은 화서·중암·성재 세 선생 문하생 으로 선생의 위정척사의 정신이 체질화된 선비였 다. 그리하여 난국에 처한 국가를 외면하지 않고, 우국의 상소를 하였고 의병장으로 항일투쟁의 선 두에 서서 구국의 의지를 실천에 옮겼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서는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고 생사에 관계하지 않고 망명·이주민 의 생활터전을 만들고 민족의식고취와 무장활동 에 일생을 바쳤다. 특히 대일 독립투쟁은 한국민 족원동사적의의가매우크다고할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구의 몸으로 머나먼 이국 땅 만주에서 오로지 조국광복의 그 날을 고대하며 독립운동에 동분서주하던 화남은 1922년 4월 2일 일제의 밀정 김헌(金憲=啓南天乙)에게 피격되어 서거하였다. 화남의 시신은 가족과 친지에 의해 만주 천령현 백기새촌 앙방하 남산에 임시로 암 매장하고조국광복을맞이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단장(제54호)을 받았으 나 후손의 사정과 내막을 잘 아는 고 박흥집 부자 가 족보를 조작하여 장손으로 둔갑하고 그 수혜 를 가로챘었다. 이 장자 문제로 법정투쟁 중에 19 92년 12월 장손인 박정훈은 만주에 들어가 조부 의 유해를 찾아 화장하여 고국으로 모셔오고, 그 이듬해 3월 6일 ‘가평의병 및 3.1운동기념사업회’ 의 이름으로 고향인 가평군 북면 이곡리 후산에 반장하였으니참으로다행한일이다. 화남의일관된우국우도와 국내외의항일투쟁의 공적은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의리에 합당한 죽음은 모두 세인의 귀감 이 되 는데 , 위 정척 사의 의 리로 국 가와 민 족을 위 하 여일생을바치다가친일적탄에희생된화남박선 생을 경모(敬慕)하고 그 정신을 계승 기리는 일에 오 늘을 사 는 우리 는 인색 해서 는 안 될 것 이다 . 그러나 똑 같은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일도 관계 당 국이 매 스컴 을 타거 나 전시 적 효 과가 있 는 경우 에는 합당성 여부에는 개의치 않고 사안을 처리하 면서, 독립유공자의 유족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사 안에 대하여는 당국이 무관심하고 각 언론도 무관 심 함은 필 자가 경 험한 안 타가 운 일이 다. 화남 박장호의 경우는 그 대표적 사례가 된다. 그러므로 그 공적에 비하여 훈장이 낮으므로 등 급을 높여야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박장호의 후손이 정계 삼부요인에 드는 인물이 있다면 훈 장 등급이나 장자장손(長子長孫) 시비에 있어서 이렇게 당국으로부터 20여 년을 외면당하지는 않 았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혼란한 세월 속 에 박화남에 관한 문헌이 잔결되어 독립투쟁의 행적을 더 이상 고증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출 처대한독립단박장호도총재실기,장삼현편저) /박지희명예기자(경기가평군지부) 대한독립단박장호도총재 선조 유지를찾아븣 출생과가계(家系) 박장호도총재묘.경기가평군가평읍산125.1992년장손인필보의아들박정훈이딸,증손녀등과만주를찾아유해를발굴,1993년 고향인가평군북면이곡리후산에반장했다가2016년8 월임야소유자가이장을요구해2019년현재의장소로가평군에서분묘를조성했다. 박장호도총재존영. 박장호 친필,1877년 스승 성재선생 문 하에서 광릉 행을 주선하였으나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별도의 날을 정해 인사 드릴것을알림(강원대박물관소장) 증조부죽재박초섭존영(화첩). 우국우도와의병활동 박장호도총재에게추서돤훈장과훈장증(1962년) 화남박선생의 순국 대한독립단의 험난한여정 만주에서대한독립단결성광복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