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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용마고가 빛은 3.15의거의 가장 빛나는 시간이 여기 있으니 1960년에 일어난 마산 3.15의거는 우리나라 첫 유형 민주화 운동이다. 그 역사의 처음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마산 용마인의 용기와 합성이 3.15의거를 이끌었다. 1960학년도 입학 예정자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합포만에 떠올라 다시 일어선 4월 11일 2차 의거로, 부정 선거에 맞선 마산의 분노가 다시 활화산으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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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의 죽음이 발견된 다음 날인 1960년 4월 12일 마산지역 8개 고교 학생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마산용마고(당시 마산상고)에서는 오후 2시쯤 1천여 명 전교생이 모여 교문을 박차고 나섰다. 이날 마산용마고 의거에는 마산지역 고교 중 최고 최대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것이 마산용마고가 보여준 힘이며, 용마인이 몸으로 쓴 역사였다. "살인 경찰 처단하라!" "김주열 군을 사살한 경찰을 학생에게 맡겨라!" "부정 선거 다시 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나아갔다. 용마인의 질서 정연하고 절도 있는 시위는 가는 곳마다 연도에 나와 있는 시민들의 뜨거운 지지 박수를 받았다. 그날 오후 3시쯤 남성동 파출소 지나 김주열 열사의 시신과 의거 희생자들이 모셔져 있던 마산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에 도착했다. 당시 김양부 학생회장, 김종배 부회장 등의 주도로 묵념과 교가 제창, 문예반 학생들이 헌정한 애도사를 낭독했다. 이어 학생 대표는 김주열 열사 시신 앞에 묵념했다. 그리고 만세 삼창을 끝으로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학교로 돌아와 자진 해산하였다. 이날 용마인의 합성은 뉴스와 외신을 타고 나가 3.15부정선거에 대한 마산의 분노를 세상에 널리 전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게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화요일 마산이 뿌린 피가, 4월 19일 화요일의 피로 이어지 이승만 독재 정권은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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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5주 만에 대한민국 역사를 바르게 광정한 그날, 진정으로 나라와 마산을 사랑한 용마인의 의기가 가장 찬란한 민주주의 정신을 빚었다. 그 이후에도 그날의 정신을 잇는 (사)3.15의거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이순항(27회), 강주성(33회), 김종배(36회), 백한기(34회), 변승기(38회), 안승옥(37회), 주입환(45회) 동문이 사업회 회장을 맡아 3.15 정신 계승에 최선을 다했다. 2010년에는 3.15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정식 제정되고 '국립3.15민주묘지'가 조성되는 등 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하는 사업들이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이어져 오고 있다. 하여 모교의 참여가 만들어낸 3.15의 빛나는 역사를 여기 기록해 길이길이 전하고자 한다. 2024년 모교 개교 102주년에 동문 시인 설일근(53) 삼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