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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의 일본 현장을 가다 ⑥ 117 무리지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강 압적인 무단통치를 식민지배 방 식으로 삼았다. 이러한 연유에서 인지 하세가와의 총독 재임 시절 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이렇다 하 게 일컬어지는 바는 많지 않다. 단 지 그가 데라우치 때부터 계속되 어 오던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3 · 1독립운동에 대한 대처 방식이 가혹하였다는 점만이 자 주 회자될 뿐이다. 그리고 그의 신 상과 관련하여 돈을 밝혔다는 사 실이 언급된다. 그가 러일전쟁때 군사 경비가 남아 호화스러운 관 저를 건설하였다는 것은 당시로 서는 꽤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국주차군 사령관으로서 을사 늑약의 공로를 인정 받아 하세가 와는 작호(爵號)를 받고 일본 제국 의 귀족이 되었다. 그는 육군 총장 이 되고, 원수에 오른 뒤, 1916년 5월 10일에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후임으로 조선 총독이 되었다. 하세가와는 데라우치가 진행 하던 조선토지사업을 인계 받아 1918년에 완료하였다. 하세가와 는 조선을 무단통치하여 철저한 일제의 식민지화를 꾀하였다. 그 결과는 3 · 1독립운동으로 나타났 다. 하세가와는 3 · 1독립운동을 무 자비하게 진압하였다. 하세가와는 무단정책과 3 · 1독 립운동 진압과정이 심하다고 하 여 1919년 8월 13일에 조선총독 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임으로 사 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왔다. 사이 토는 조슈번 출신도 아니고 육군 이 아닌 유일한 해군 출신 총독이 었다. 화성제암리사건을 은닉한 조선 군사령관 3 · 1독립운동 가운데에서도 가 장 혹독한 일제의 만행이 자행된 지역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일 대였다. 1919년 4월 15일 일어난 화성제암리사건은 다른 사건과는 달리 일제가 의도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하였 다는 점에서 잔인성과 가학성이 부각되었다. 일본군 육군 중위 아 리타 도시오[有田俊夫]는 제암리 주민들을 집합시키고 불을 질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사격을 하여 죽였다. 이들은 일제에 저항하지 도 않았던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이처럼 무자비한 진압의 배경 ➊  3 · 1독립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서울의 탑골공원 팔각정과 1966년에 세워진 손병희 동상(필자 촬영)  ➋  탑골공원에 있는 3 · 1독립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낭독 부조(위키백과 제공) ➊ 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