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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혁(당시21세) 운경 공원묘지에 안장 1966년 3월 4일 서울 출생 1984년 3월 서울대 서양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헌신중 수차례의 구류를 삶 1986년 5월 20일 학내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전치 10주의 부상 1987년 4월 23일 군입대 1987년 9월 8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22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전두환정권 학생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84년 서울대에 입학 학생운동 동아리인〈경제법학연구회〉에 가입하여 각종 시위와 집회에 참석하였다. ’86년 5월 20일 당시 문익환 목사가 서울대 민 족해방제 기간 중‘광주민중항쟁의 민족사적 재조명’이란 제목으로 주제발표강 의를 마친 직후 서울대 재학생 이동수 동지가 분신하였고, 경찰이 집회를 해산하 기 위해 학내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 과정에서 동지를 포함한 14명 이 부상당했으며, 이때 10주 진단의 부상을 입어 남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동지는 ’86년 하반기 이후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현장 활동을 준비하 였고, 과외를 하여 수배자를 돕기도 하였다. 군입대 직전까지 민주화운동에 투신 할 것을 결심하고 노동현장으로 이전을 준비하였다. 동지는 경찰에 구류와 부상을 당한 후 가족들의 권유에 의해 ’87년 4월 군에 입 대하게 된다. 9월 8일 부대내에서 분신한 상태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군 당국은 평소 성격상의 이유와 복무 부적응으로 인해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자살한 것으로 수사 종결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는 훈련소에서부터 보안사령부 및 보안 부대, 지휘관 및 부대 군종부에 의해 보직이 변경되는 등 일상생활 깊숙한 부분 까지 체계적으로 관찰∙관리되었다. 운동권 출신 관찰사병이라는 사실이 부대원 들에게 알려져 얼차려, 언어폭력 등 차별 대우를 받았고, 유격훈련 중에는 조교 의 구타로 팔에 부상을 입기까지 하였다. 9월 초순경 정보과 내에서 비밀문서초 안지가 분실되어, 보안대 조사를 받는 등 동지는 분실책임자로 내몰리게 되었다. 기무사의 자료 비협조로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가 완전히 밝혀지지 못하였다. 윤 석양 양심선언에서 밝혀진‘서울대생 동향파악 대상자’378명의 카드에서도 최 우혁의 카드가 존재하는 점 등 보안사의 지속적인 관찰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끝내살리라 |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