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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에서 발생했던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8년 6월 7일: 양병춘(21, 여)은 금악리 친정에 가다 서청에 연행돼 저지지서 로 끌려가던 중 총살됨 11월 2일: 박은화(27, 여)는 애월면 신엄리 친정집에 가던 중 신엄지서 경 찰에 연행된 뒤 총살됨 11월 9일: 강성학(34, 남)을 비롯한 양동림(18, 남), 양동화(34, 남, 이명 양동익), 양태호(49, 남) 4명이 서청에 의해 저지지서로 연행됨. 이후 한림국민학교로 끌려갔다 동명리 신겡이서들에서 총살됨 (동명리–학살터–신겡이서들, 참조) 11월 20일: 김여택(30, 남)과 홍맥이(34, 남) 2명은 토벌대에 연행된 뒤 동 명리 신겡이서들에서 총살됨 상명 주민들은 소개지에서도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소개하고 얼마 지나 지 않은 1948년 12월 3일 무장대가 금릉리를 습격했다. 토벌대는 다음날부터 이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소개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토벌대는 소개민들을 한림 국민학교로 끌고간 뒤 한림리 물왓, 대림리 봉근굴, 동명리 신겡이서들 등지에서 학살했다. 이 학살은 1949년 초까지 계속됐다. (한림리–학살터–물왓, 대림리–학 살터–봉근굴, 동명리–학살터–신겡이서들, 참조) 소개 몇 달 후인 1949년 봄, 다른 많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고향마을에 성을 쌓고 돌아갔다. 그러나 상명주민들은 그러지 못했다. 토벌대가 상명과 금악을 위 험지구로 간주해 복구를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9년 봄 명월 상동인 고 림동이 재건되자 상명리 주민들은 금악리 주민들과 함께 고림동성에 함바집을 짓 고 거주했다. 그러다 8~9월께 상명리를 오가며 성을 쌓고, 10월에 축성이 완료되 자 주민들은 복귀했다. 당시, 월림 주민들도 일부 함께 들어와 생활하다 월림리에 축성이 된 뒤 돌아갔다. 현재 상명 주민 중 4·3희생자로 정부가 인정한 사람은 모두 53명(남성 46명, 여 성 7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