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page
115 서귀면 터-벌내물, 참조) 1950년 8월: 오동건(40, 남, 화순국교 교장)이 예비검속된 뒤 섯알오름 탄약 고터에서 총살됨 현재 정부가 인정한 토평리의 4·3희생자는 91명(남 75명, 여 16명)이다. 1) 4·3성 - 토평리 4·3성 가. 소재지 서귀포시 토평동 133-2번지 나. 개요 토평리는 4·3 시기 350여 가호의 주민들이 살았던 큰 마을이다. 1949년 초, 주 민들은 마을을 들러싸는 축성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성문은 동문(동동네의 상효 동으로 가는 길목)과 서문(지금의 영천동 주민센터 앞), 남문(토평초등학교 서북 쪽), 북문(토평동 1527-8번지 앞), 서북문(토평목장 가는 길목) 5개가 있었다. 성 문 사이사이에는 초소를 두어 보초를 섰다. 축성과 보초를 서는 일에는 15~16세 이상의 남녀 모두가 동원되었는데 1957년 통행제한이 풀릴 때까지 계속 됐다. 특 히 남서쪽 초소는 여자들이 주로 보초를 섰다. 토평리는 이중성을 쌓고 안성과 밧성(바깥성) 사이에는 가시덤불을 놓았다. 토 평동에서 만난 김임숙(1934년생, 여)은 자기 집 우영팟에도 성담이 있었다고 했 다. “일로 꾸짝허게 잇어나신디 끝나난 해제허여불었주. 그때 성담이 이중으로 잇 어나서. 가운데는 가시들 해단 막 놓고 허고. 이게 안에 있던 성담이라나서.” 토평리는 특이하게 간성도 만들었다. 마을의 중심도로인 지금의 영천동 사무소 에서 상효동으로 이어지는 한질 남쪽에 동서방향으로 일(一)자 형태로 쌓았다. 큰 마을이라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당시에도 이곳에는 보초를 세우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주민들이 고생한 만큼 전략상 필요했던 성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태 익(1936년생, 남)이, “우리집 바끄레(밖거리)로 해서 지금 동사무소까지 죽 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