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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한림면 10. 동명리 동명리는 4·3 시기 문수동(40호)을 비롯해 한천동(25호), 거전동(케왓, 20호), 남문동(30호), 진근동(30호)의 다섯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명리는 4·3 기간 이웃 마을인 명월리와는 달리 큰 인명 피해는 없었다. 주민들과 관계된 사건은 1948년 5월 10일 이후 5·10선거를 거부해 중산간 지 역으로 일시 피했던 주민들 중 청년들이 제11연대에 체포돼 농업학교에 수감됐 다 풀려난 것이 시초였다. 그러던 1948년 11월 16일, 5일 기한으로 마을에 소개 령이 내려졌다. 주민들은 한림 등지로 소개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날인 11월 20 일에는 문수동과 한천동, 거전동 주민들도 한림이나 동명의 소개되지 않은 남문 동, 진근동 등지로 마지막 짐들을 챙기고 떠났다. 그러나 가장 산쪽에 가까웠던 문수동 주민 중 청년들 다수는 소개하지 않고 인근에서 숨어 지냈다. 이들은 그 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토벌대에 체포돼 타지방 형무소로 보내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총살됐다. 동명 주민들은 소개지에서도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없었다. 당시 제주도 군경토 벌대가 주둔했던 어느 곳에서나 그랬던 것처럼 동명 주민들도 무장대가 해안마을 을 기습하고 간 다음날에는 토벌대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다 총살됐다. 무장 대의 1948년 12월 3일 금릉 습격과 1949년 1월 3일 협재 습격 이후 동명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