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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제주읍 마루에 실어다가 죽였다. 옛날엔 거기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날 도남 사람만 10여 명 희생됐다. 5. 문덕호(남, 도남동, 1933년생) 형은 나보다 두 살 위로 농업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글씨를 잘 쓰고 영리 했다. 민보단원으로 활동했고, 동네에서 신망이 좋아 동장님을 도와 마을사무도 봤다. 1948년 음력 12월 19일 낮 12시쯤 사무를 보던 형님을 대동학생단 소속의 이○용(당시 제주중학원 학생, 형보다 1살 위)이 “경찰에서 조사할 게 있다”며 데 려갔다. 나도 바로 옆에 있었다. 형은 외투를 벗어 내게 주며 “어머니 갖다 드려 라. 경찰서에 갔다오마” 하고, 나갔다. 난 곧바로 부모님께 알렸고 집에서는 난리 가 났다. 당시에는 경찰에 잡혀가면 소식을 알기가 어려웠다. 한 달이 넘을 때까 지도 소식을 몰랐다. 그러던 중 오라3동 중댕이골(도령마루) 소나무밭에서 10여 명이 총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거기에 형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 에서 혹시나 하고 가족들이 찾으러 갔다. 4개월 정도가 지난 후라 시신을 구분할 수 없었다. 우린 양복을 알아보고 시신을 찾았다. 시신을 수습해 마을공터에 눕혔 는데 몸 여러 군데가 총알자국으로 구멍이 뚫려있었다. 마을사람들의 애도 속에 장례를 치뤘다. 만약 형이 좌익운동을 했으면 그렇게 공개적으로 장례를 치르지 도 못했을 것이다. 형은 잘못이 없다. 아버님이 형의 제삿날(잡혀간 날)이 가까워 지면 동쪽을 향해 “이○용이 이놈! 우리 아들 잡아먹은 놈!” 하면서 외치곤 했다. 6. 김영찬(남, 도남동, 1937년생) 도남에는 당시 오등과 고다시, 죽성 주민들이 소개와 있었다. 1948년 음력 12 월 2일 도남이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 이 사람들은 동척회사에 수 감되었다가 음력 12월 9일 도남 주민 9명과 오등, 고다시, 죽성 주민 29명이 도 령마루로 끌려가 총살됐다. 그 당시 도령마루는 잔디밭이었다. 도남 출신 희생자 는 김유현, 김봉호, 허창돈, 정창일 부, 허창홍, 부재숙 등이다. 7. 강계출(여, 오등동 고다시, 1923년생) 오등리 주민들이 광양에 소개 내려가 있었다. 광양운동장(현 시청 마당)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