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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➊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㉒ 111 낼 선물을 구매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걷지 못할 정도였다. 결혼 할 때 필요한 혼수도 가리봉시장 에서 구매했다. 1984년에 발간된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는 그의 시 「가리봉시장」도 수록 되어 있다. 록 밴드 ‘언니네 이발 관’은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여 노 래 ‘가리봉시장’을 불렀다. 가리봉 시장은 이제 구로공단 노동자들 의 애환이 담겨 있던 곳에서 조선 족 동포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곳 으로 바뀌었다. ‘깔딱고개’는 가리봉시장과 그 위에서 자취하는 노동자들을 연 결하던 고개로 ‘가리봉시장 고개’ 로 불리기도 한다. 가리봉시장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과거를 기 억하는 쪽방촌이 있고, 남쪽으로 는 첨단을 달리는 G밸리가 자리 하고 있어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변화된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 는 곳이기도 하다. ‘깔딱고개’에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구로공단 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조형물 등이 설치되어 있다. 구로군용지 강탈사건, 구로공단과 공영주택·간이주택 조성의 역사 구로동 군용지는 일제가 군용지 로 사용했던 적산(敵産)으로 약 30 만 평에 달했다고 한다. 농지개혁 당시 농지분배 대상으로 분류되어 농민에게 분배되었는데,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이곳이 국유지 로 분류되어 국가에 강제로 수용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국가를 상 대로 소유권 소송을 냈고, 일부 승 소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구로공 단 조성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소송에서 증언 한 공무원과 소송 당사자인 농민 을 '소송 사기' 혐의를 적용해 구 속하고 실형을 선고하였다. 수사 과정에서는 구타·고문 등 인권침 해까지 있었다. 이를 ‘구로군용지 강탈사건’이라 부른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강탈한 구 로군용지 중 10만 평에 12억 환 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공영주택 과 간이주택 875동을 신축했다. 당시 언론은 이를 ‘국내 최대규모 의 주택촌’이라고 했다. 남구로역 근처에는 간이주택과 공영주택 의 흔적이 남아있다. 600호에 달 한 공영주택은 호별(6~7평)로 방 2개에 부엌과 변소를 갖춘 2호연 립주택(총 건평 13~14평)이었는 데, 물은 공동우물에서 해결하였 다. 275호에 달한 간이주택은 호 구로구청 농성사건의 현장(현 구로구청의 모습, 왼쪽) 구로구청 점거농성 사건 강제 진압 관련 동아일보 보도 기사 (1987.12.18) 구로역 북쪽 광장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