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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義兵(을미의병)과 충주성전투(忠州城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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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은 일제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친일내각의 단발령(斷髮令)에 분노하여 1895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을 말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의병부대는 유인석이 이끌었던 호좌의진(湖左義陣)이며, 충주성 전투는 호좌의진이 거둔 가장 큰 성과이다.
제천에서 부대를 정비한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점령한 것은 1896년 2월 17일 (음력 1월 5일)이다. 그때 의병의 주력부대는 박달재와 산척을 지나 북창에서 남한강을 넘어 충주성을 공격하였고, 별동대는 청풍을 지나 마즈막재를 넘어 충주성으로 향했다. 농민들까지 포함하여 일만 명 가까운 대부대가 충주성을 향하자, 성을 지키던 일부 지방군은 의병을 환영하며 성문을 열어주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의병의 공격에 놀라 달아났으며, 호좌의진은 단발을 강요하고 일본군을 끌어들인 죄를 물어 충주부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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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성을 기반으로 서울로 나아가려던 호좌의진은 끝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20일 남짓 충주성에 머물면서 수안보와 가흥에 주둔중인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였으나 돌파하지 못하였고, 충주성 전투에서 수많은 민가와 향교가 불타버렸다. 그리고 일본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여 제천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에도 호좌의진은 끊임없이 충주의 일본군 기지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호좌의진이 한때나마 충주성을 장악하고 관찰사를 처단한 일은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나라를 도적질하는 무리를 베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친일내각의 지시를 따르는 지방 관리들을 베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던 호좌의진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으며, 친일 내각의 지시를 무턱대고 따르던 친일 관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일본의 침략에 반감을 품고 의병을 꿈꾸던 이들은 충주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큰 용기를 얻었다. 유인석 의진의 충주성 전투는 을미의병의 전국적 확대와 호좌의진의 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