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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4월30일 수요일 11 (제220호) 독자마당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다산의 일생을 태어나서 운명할 때까지 날짜별로 확인할 기록이 있습니다.연전에 조성을교수가편찬한『연보로본다산정약 용』이라는책은확인할수없는부분을제외 하고는 생애 전체를 날짜별로 알아보게 정 리된책입니다.1801년40세에걸려든신유옥 사이래,18년의귀양살이동안,해배뒤인69 세의 1830년에 이르기, 다산을 죽이고야 말 겠다던반대파들이얼마나집요하게다산을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으려 온갖 음해와 모함을가했던가를알아볼자료입니다. 자신의 자서전격인「자찬묘지명」이나 『연 보』에도 몇개의기록이 있지만,당시의『승정 원일기』나『실록』에는 빠짐없이 사실을 기록 하고 있어, 죽음의 사신(死神)을 무릅쓰고도 끄떡없이 공부와 저술에 생애를 바친 다산의 굳은의지와인내심을넉넉하게알아볼수있 습니다.1801년음2월29일유배지경상도장기 현으로출발하여3월9일장기에도착하고,그 다음날인3월10일부터기거할장소에서유배 살이를시작했습니다. 도착 3일 뒤인 3월 13일자『승정원일기』 에는 장령 권한위(權漢緯)가 귀양 간 정약 전·정약용형제를붙잡아다가다시국문하 여 죽여야한다는계(啓)를올렸다는기록이 있습니다.이미 확정판결을 받고 유배 간 사 람을다시국문하자는번거로운짓은하지말 라고 각하했지만, 그때 이래 귀양살이가 끝 날 때까지 끊임없이 계와 상소는 이어졌고, 해배뒤에도온갖음모와비계로다산을죽여 야한다는주장은끊임없이이어졌습니다.첫 번째 옥사에서 털고 털어도 천주교와는 ‘절 의(絶意)’했음이확인되어죽여야한다는온 갖 비방을 묵살하고 귀양을 보냈는데, 무슨 원한이 그렇게 심했고, 무슨 앙심이 그렇게 도깊어,계속죽여야한다고했을까요. 1801년3월13일이후,16~27일까지,4월2· 3·4일,7월11일,9월16일등1년내내이어졌 고,1808년에는3월에서11월까지날마다죽 여야 한다는 계가 올라왔다고 승정원일기 는기록하고있습니다.해배하던1818년8월 중순에명령이내려지는데,8월17일자에도 정언(正言)목태석이라는자가다시유배지 로 보내자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습니 다. 해배 뒤인 1827년 10월에도 윤극배라는 자가 참혹한 무고로 다산을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1830년 69세에 도 윤극배는 또다시 날조된 사실로 다산을 죽여야 한다고 하여. 다산이 공포와 불안에 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악행을 저지르기 도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세상과 역사가 바뀌 었으나한번품은앙 심과 흑심을 삭이지 못하고 끝까지 죽이 기만을 바라는 인간 의마음은어디서오 는 것일까요.설사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그 만한세월,그만한역사가변했다면그냥두기 라도해야하건만,특별한잘못도없이억울하 게당한사람에게그렇게가혹한저주와증오 를이어갈이유가어디에있었을까요.그렇다 고다산처럼강한의지와굳은신념을지닌사 람이꺾일이유가있습니까.죽음을무릅쓰고 도포기도,좌절도없이세계적수준의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다산,끝내는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하사받아 최고의 학자로 대접받았으 며,실학의집대성자로온국민의추앙을받기 에이르렀습니다.지금의세상에도하찮은일 로온갖비방과저주에시달리는사람이있습 니다.다산의 예에서 보았듯이,이제는 모두 놓아주어 증오와 저주의 늪에서 벗어날 길 을열어준다면어떨까요.‘필부의의지’는꺾 을수없다는것을알아야합니다. 죽음의 공포도 이겨낸 다산 부자가 되는 길 모두가 다 안다. 그러나 모두가부자되지는못한다.돈,돈,돈하면 돈 나갈 일이 생긴다. 일, 일, 일 하면 돈이 들어온다.성공한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지 ‘일에 미쳤다’라는 소릴 듣는 사람이다. 일 에 미치니 즐거움이 들어오고 성공과 행복 도들어온다. 일을 지겨운 노동으로 보면 성공이 도망 간다. 장사하다가 ‘그만 두겠다’고 속으로 만생각했더라도매출이뚝떨어진다.정신 이 작용하기 때문이다.돈,능력,인맥이 있 어야 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다. 그러나더중요한것은‘열정’이다.Hungry 정신은열정내고몰입하는데최고다.열정 을갖고일하는사람은일을노동으로생각 하지않는다.일자체를즐긴다. 사람들은 자기가아는 만큼 받아간다.모 르는부분은생각도하지않고무시해버린 다. 아주 쉬운 일도 어렵게 생각한다. 선입 견으로 그러려니 하고 예단하고 예측해 버 린다.그러기에성공하지못한다.생각이육 신의변화를지배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정신동력의 중요성을알아야한다.내가 상 대방이 어떻게 할 것이다 생각하면 상대방 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 안 할 것이다 생각 하면 실제로 안 한다.남편이 늦을 때,부인 이 술 먹느라고 늦겠지! 하는 순간 남편은 술먹게된다.정신이풀려버리기때문이다. 그러나 술 안 먹을 거야, 뭔가 바쁜 일이 있 기에늦어지겠지!하면아무리붙잡아도술 안먹는다.정신동력이작용하기때문이다 TV보다보면나쁜정보가무의식속에입 력된다. 정보들은 무의식 속에 들어 있다가 상황조건이맞으면욕이튀어나온다든지주 먹질을 한다든지 행동으로 재발 된다. 유전 자도내것이면서동시에내것아니다.부모, 조상의 유전자가 다 내 안에 있기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의식과 무의식이 나를 부자로 도 만들고 불행하게도 만든다. 의식을 바꾸 려는노력이중요하다.가장쉬운방법이,일 을 성스럽게 생각하고, 짐스런 노동으로 생 각하지않는것이다.일할때두가지방법이 있다. 몸으로만 일하는 경우와 몸과 정신이 합쳐져일하는경우다.일은1(일)이다.하나 라는 뜻이다.몸과 육체와 정신이 함께 일속 에들어가서몰두,몰입,혼신의노력이되어 야일(1)이된다.몸과정신이하나되어혼신 이 몰입되어 일할 때 성공한다.그렇기에 일 이마음에안들더라도집중해서해야한다. 일마다 Peak Line이 있다. 제일 힘들었 다가극복했을때의정점이다.정신적피로 점, 육체적 피로점을 극복한 시점이다. 이 피크라인 밑에서는 겨우 먹고 사는 상태이 고, 피크라인을 넘으면 빚을 갚는 상태이 며,빚을 다 갚으면 그 때부터가 부자가 되 어가는 상태이다.피크라인을 넘으면 빚을 다 갚았기에 자아 개발,즉내가누구 인가 하는 나의 실 체가 모습을 보이 게 되는 단계로 진 입한다. 자아가개발되면 마음이 즐겁다. 운 명이바뀌기시작한다.나에서우리라는개념 도생긴다.싫은것이없다.시간의흐름도모 르게 된다. 그래서 자아개발을 위해서 일을 사랑하고일에정을넣어야한다.자아개발이 인생의목표가되어야지돈이목표가되면안 된다. 부부는 원수끼리 만난다는 속설이 있다. 부부간에 빚 갚는 인생이 있고,빚 받는 인 생이있기때문이다.그래서결혼은채무관 계 때문에 한다는 말도 있다. 피크라인 밑 에서는 빚 갚는 일이 없다. 피크라인에 도 달해야 그때부터 빚 갚는다. 빚 갚으려 열 심히 상대방을 위해주면 빚 다 갚고,빚 다 갚게되면그때부터축적되어부자된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못하는 사람은 자기 아는 수준에서만 판단하기에 이해가 안 되면 쇠귀에 경 읽기이다. 쓰이 다간다생각하고마음을열면보이고이해 된다.스트레스 받으면 아드레나린이 나온 다. 그러나 즐기며 일을 하면 엔돌핀이 나 온다. 정신동력은 생각한 것을 끌어온다. 나쁜쪽으로의생각은나쁜것을끌어오고, 좋은 생각은 좋은 일을 끌어온다. 일이 복 이냐노동이냐는생각에달렸다.돈생기지 않는일도사회를위하여열심히하자. 내안의잠자는거인을깨워라 박승주전여성가족부차관 누군가 물었다. 뷺왜 사는가?뷻 븮그븯는 답 했다. 뷺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 다.뷻 뷺자신이 행복해진다는 것은 무엇인 가?뷻또물었다.븮그븯는또답했다. 뷺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부와 명예,권 력등을 가지면 행복하다 느끼는 사람도 있 겠지만,나는 내 자신이 무슨 일을 했을 때, 그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 습을보고,내자신도행복해진다뷻면서뷺자 신이 한 일로 다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중 하나가 정치이기 때문에 나는 정치를 선택 하게되었다.뷻고말했다.븮그븯가누구라고밝 히지는않겠다.요즘대선시절이고,그는유 력한 대선주자 중 한 명인데 이름을 밝히면 내 글이 정치적인 글이라 오해받기 때문이 다. (속 보이는 짓인가?ㅎㅎ)내 진심은 오늘 내글이정치적인글이아니라정치를빌려서 우리들삶에관한이야기라고말하고싶다. 나는 내가 정치에 발을 담그고 2006년 처음 선출직에 도전했을 때 많은 질문을 받았다.뷺왜정치를하려하는가?뷻솔직히 그때까지 내가 정치를 하려는 이유에 대 해 뚜렷하게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살다보니 그 렇게 되었을 뿐 이 었다. 진짜 나는 내 가 이 사회 에서 어 떻게든살아내려다 보니어찌어찌해서 정치까지하게된것뿐이었다. 내가 정치 쪽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가 내 나이 35살이 넘어 더 이상 공직시험을 칠 수 없었을 때였다.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럴듯한 말이 필요했다.초 짜 정치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랬듯이,뷺국 민과 주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입니 다.뷻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나중에는 좀 더 세련되게,뷺국민과주민들에게븮선한영향 력븯 을 펼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뷻 라고 말하기도했다. 주민에 대한 봉사와 선한 영향력, 내게 그런 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진 짜 솔직한 맘은 그게 아니었다.대부분 정 치인들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정치해 서 권력과 명예를 가지게 되면 내 자신도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니까 정 치를 했다. 솔직히 대부분 정치인에게 이 게정답일것이다. 어느 특집대담에서븮그븯라는정치인은 자신도가끔 자기가 왜 정치를 하는지생 각해 본적이 있다면서 말했다. 뷺힘 있는 정치인 시절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대다 수사람들이 행복해 할 일을 밀어붙여성 공시켰을 때 그 많은사람들이내가한일 때문에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그때가 자기자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중 하나였다뷻면서 븮그븯는 뷺자신이 행복해지 기위해서정치를하고,정치를떠나지못 한다뷻라고말했다.이어서븮그븯는뷺자기는 그런 마음으로 정치를 하니 정치가 너무 즐겁다뷻고 했다. 그러면서 뷺정치를 즐거 운 마음으로 해야 국민들도 즐겁지 않겠 냐뷻고도말했다.이에하나덧붙여븮그븯는 말했다. 뷺권력을 잡으면 자기와 반대 입 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보복하고 괴롭 히는 것이 행복한 일 일까요? 저는 그런 일에전혀행복을느끼지않으며,제가행 복해질수있는일만하기에도저에게주 어진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뷻 이 말에 사 회자는 웃으면서 뷺당신은 타고난 정치인 이라면서 그러니까 정치를 계속 해야 한 다뷻 면서 뷺자기는 그래서 정치를 안 한다 뷻고까지말했다. 이런 대담에서 븮그븯의 말이 조금 가식적 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난 안다.내 가 정치를 하면서 그런 사람들 가끔 봐왔 기 때문이다.난 정말 어떤 선출직이던 간 에븮선거운동븯처럼육체적,정신적으로힘 든일은없다고본다. 진짜로 사람 맘 얻어 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특히농어촌지역작은선거일수록 이러한게더심하다.큰선거나도시선거는 당시부는선거바람에큰영향을받고쉽게 당선되는경우도꽤있다.어쨌든선거운동 은별소리를다들어가면서본인속마음과 전혀다르게누구에게나웃는얼굴로사람 들을만나고,여러곳곳을다녀야한다. 작은지역정치인들은선거운동기간뿐 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이래야 한다. 그런 데 이 어려운 일을 즐기면서 잘 해내는 사 람들도 있다. 진짜로 뷺이런 일들이 즐겁 냐?뷻 고 내가 직접 물어본 적도 있다. 뷺진 짜즐겁다뷻는대답을들었다.정말이런분 들이 있고, 이들이야 말로 타고난 정치인 들이다.중요한 것은 이런 마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이런 마음에 제대로 된 정치 적 사명감과 책임감, 그리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가능한 지성적 리더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즐겁다고, 자기 행복을 위한답시고 오도된 생각으로 정치 하고, 정책을 하면 이런 마음은 국가와 사 회에엄청난흉기가될수도있다. 어쨌든 난 선거운동 등이 너무 싫었다. 어쩔 수없이 하긴 했지만 정말 싫었다. 물 론 당선되어서 하는 일은 할만 했다. 재미 도 있었고 잘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선거운동 때보다는 덜 하지만 행사장 쫓아 다니고, 사람들 만나 눈치 보 며 웃음을 팔아야 하는 짓은 못 할 일이었 다.그래도정치를시작하면서세운목표까 지는 가 보자는 마음으로 해 봤지만 이런 내 마음으로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 다. 즐기지도 못 하면서 억지로 했으니 되 었겠는가? 이런 내 마음으로는 정치의 길 은 내 길이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대담에서 사회자는 그를 향해 마지막으 로말했다.뷺정치하려는것은<권력을가지 는 권 한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할 수 있 는 권한>을 가지려고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으며, 그렇게 권한을 가진 일로 인하여 남들이행복해하는것을보면나도행복해 진다는말에큰감동을받았다뷻면서뷺바로 이런생각으로정치를하는사람이많아져 야 우리 정치가 바로 서고 우리 사회가 제 대로 굴러 갈 것이다뷻그리고 웃으면서 사 회자는 뷺이런 마음으로 정치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마 음이부족해서정치를안한다.뷻나또한윗 글에 말했듯이 그런 마음이 부족하기는 마 찬가지이고,내가정치를안하는중요한이 유이기도하다. 또한 나는 지역 작은 정치인에 불과했 지만, 정치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도 나는 정치를안하려한다.^^ 난정치를왜안하는가? 박 철 홍 전남도의회前의원븡담양군종친회사무국장 뱚발뱞뱞행뱞뱞인:박순구 뱚취재편집:박상섭 뱚경영지원:박재기 기사제보븡광고신청븡구독안내 대표전화(055)352-7224 FAX(055)352-7225 뱚구독료년40,000 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 예금주:한빛신문 뱚뱜 50429 경남밀양시내일중앙길11밀성회관1층 뱚뱜 본지는신문윤리강령및그실천요강을준수합니다 (2007년1월12일등록번호대구다-01225) 500만박씨성손의대변지 2007년1월24일창간(월간) 고려의사(高麗義士, 휘 承奉)공을 비롯한6代18위의시향이지난1일1 1:00전남장성군황룡면신호리호산 재에서 한학자 노강 박래호 선생이 집례를 맡아 경열 종손이 초헌관으 로 헌작하고 이어 아헌관 봉조, 종헌 관종만현종이각각잔을올리고,래 지전회장(고문)의독축으로40여분 에걸쳐엄숙하게봉행되었다. 호산재 향사 전에는 전남 담양군 월산면 선영에서 오전 8시30분 절의 (節義)의상징인돈재박연생선생의 추모제향이묘소에서있었다. 밀성박씨 돈재공파는 절의를위해 은둔하며태인박씨로개관하면서까 지 꼭꼭 숨어들어 은거했던 도평의 사공의 후예 돈재(遯齋) 휘 연생(衍 生)공으로부터문호가열린다. 돈재공은 단종 때 충무시위사 대 호군(大護軍)으로,수양과절친한사 이이나 수양의 부름을 거절, 남하 할 것을 결심하고 천첩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라 하고, 고향 태인에서 아버 님을 모시고 장성 아치실로 옮긴 뒤, 다시 독신으로 담양 월산면의 사위 이석손집에은거하였다. 수양이1455년왕위에오르고12월 27일전지(傳旨)하기를'대호군박연 생은 원종공신(原從功臣) 삼등(三 等)에 녹(錄)한다' 라며 교서(敎書) 를 내리고 불렀으나 병든 몸이라 칭 하고나가지않았다. 호산재는 장성 최초 입향조인 사정 공(司正公) 휘 덕명(德明)을 비롯하 여 조선조 청백리 정혜공(貞惠公)휘 수량(守良)까지5世의묘소를수호하 고 재향을 받들기 위해 창건되었다. 그리고 이후많은선조분들의 묘소가 함께하고있으며,지난2013년사정공 의 아버지 고려의사 휘 승봉(承奉)의 제단을 세워 함께 수호하고 있다. 의사공(휘승봉)은도평의사공(휘 언상)의 7대손으로 인의현(仁義縣) 에 적거(翟車)하신 휘 거인(居仁)의 차자로고려가망(亡)하자벼슬을버 리고 은거하여 의분(義憤) 한탄(恨 歎)하며 형 휘 문봉(問奉)과 함께 기 관(棄官) 경서(經書)로 마음을 달래 며성현(聖賢)의학문을닦았다.선생 은 역성(易姓) 혁명(革命)을 부끄럽 게 생각하라 하자 모두들 의사(義士 ) 라칭(稱)하였다. 한편 이날 제향 후에는 정기총회 를 열어 지난해 결산보고와 감사보 고를 듣고 종중운영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 가운데 래천 회장(도유사)은 꽃들의 향연이 이어지는 봄철에 행 락을 마다하고 선조 향사에 참여해 준 일가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젊은 청년들이 많이 참여할 수있도록하여달라고당부했다. 밀성박씨돈재공파호산재시향봉행 충절의가문,선조의높은절의 정신기려 고려의사공을 비롯한 6대 18위의 제향이 지난 1일 봉행된 가운데 참례한 후손들이 제관 과 함께하고 있다. 4월 둘째 주 일요일을 맞은 지난 13 일 오전 11시 밀성박씨 백우당공파 참봉공 관동문중은 전남 장성군 동 화면 소재 경모재에서 6대 15위의 선 조시향을모셨다. 경모재 배향선조는 어모장군 휘 사순(士珣), 백우당공(휘 상의), 손 자 참봉공(휘 윤감)과 그의 아들 사형 제(휘행간,행경,행민,행중)이하후 손으로 노강 박래호 선생의 집례로 초헌관에는 영섭, 아헌관 선구, 종헌 관인구,축관래지,좌집사정상,우집 사 창구, 분헌관 택열, 래현, 병규, 성 현,은상,래필현종이각각맡았다. 백우당공은 어모장군 휘 사순의 아들로 1538년 전남 장성군 황룡면 보룡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월사(月 沙)의 추천에 의해 봉훈랑(奉訓郞) 에 발탁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본 위부호군(本衛副護軍)에 올랐다.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강호(江湖)에 소요(逍遙)하다가 1621년(광해군 1 3)에 향년(享年) 84세(歲)로 세상을 버렸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양호 장 군이군사(軍師)로예우하였고,1578 년 율곡 이이, 중봉 조헌, 토정 이지 함,구봉송익필등과하늘의장성(長 星)을 보고 앞으로 국운을 논의하면 서 15년 뒤에「靑衣賊入自國城東門」 ‘왜적이 장차 서울 동문으로 쳐들어 오리라’하고예언을하였으나누구하 나 믿지 않았다.다만 율곡 이이는 이 말을귀담아듣고임진강변에화석정 을 짓고 들기름을 먹여두어 후일 선 조의 피난길에 칠흑 같은 밤에 강을 건너기 위해 이 정자에 불을 붙여 무 사히강을건넜다는일화를남겼다. 백우당공의 아들 윤감은 군자감 참봉으로 아들 중 넷째 매헌공 휘 행 중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 봉양 에 소홀함이 없었고, 아버님이 돌아 가심에 시묘하고, 어머님이 돌아가 심에 예법과 슬픔이 지극하였으되 상복 입은 기간이 부족하다하여 한 발자국도시묘(侍墓)밖에나오지아 니하면서6년동안초상때와같이하 였으며, 아버지 없는 어린 조카들과 어머니 잃은 생질들을 모두 보살펴 혼인 못한 일이 없게 하였고, 가난한 친구가 별세하면 장지를 마련해주 고,오고갈때없는사람에게살곳을 마련해주는 등 배려와 나눔의 실천 을평생이어갔다. 특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깊은 연구력을 다하여 평생 몸가짐 이 충효에 힘을 써 매헌처사로 통하 였다. 밀성박씨백우당파참봉공관동문중경모재시향봉행 천문지리에밝아 도선국사의계보를잇는 백우당박상의선생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