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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김혁봉은 동명리 신겡이서들, 김여길은 한림리 강구동에서 각 각 총살됨 (동명리–학살터–신겡이서들, 참조) 11월 20일: 홍시병(18, 남)은 11월 15일 한림지서로 연행됐다가 이날 한림 묵은 오일장 옛터에서 어음리 주민 6명, 한림리 주민 1명과 함 께 총살됨 (한림리–학살터–한림 묵은 오일장 옛터, 참조) 11월 22일: 양명식(19, 남)은 조수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저지지서 경찰에 의해 동료교사와 조수리 주민 등 6명과 함께 총살됨 (조 수리–학살터–조수국민학교 옛터, 참조) 12월 7일: 김상림(31, 남)과 임행숙(26, 남)이 토벌대에 연행된 뒤 봉근굴에 서 금악리 주민 6명과 함께 총살됨 (아래 학살터-봉근굴, 참조) 이즈음, 대림리 봉근굴에서 수차례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학살은 주로 1948년 12월 3일 무장대가 금능리를 습격한 이후 토벌대가 자행한 것으로 희생 자는 대부분 중산간 마을 소개민들이었다. 그 후 대림리에서 얼마 동안은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제주도의 다른 마을에서처럼 예비검속으로 주민들이 연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먼저 양명만(50, 남)이 예비검속됐다. 그는 1948년 11월 22일 조수국민학교에서 학살사건이 벌어질 당시 조수국민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그날 총살된 양명식은 그의 6촌이었다. 양명만은 1950년 7월 26일,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50년 7월 15일 즈음, 김두석(36, 남)을 비롯한 김병생(54, 남), 김봉 문(28, 남), 신두인(46, 남), 오계하(31, 여), 이방수(29, 남), 조춘보(45, 남), 채만 수(19, 남) 등 8명이 한림지서 경찰에게 연행돼 한림 어업창고에 갇혔다. 이들은 8월 19일 모슬포로 끌려가 다음날인 20일 새벽 상모리 섯알오름 옛 일본군 탄약 고터에서 학살됐다. 이들은 현재 금악리 만벵듸 공동장지에 모셔져 있다. (금악 리–희생자 집단묘지–만벵듸 공동장지, 참조) 현재까지 대림리 주민 가운데 정부가 인정한 4·3희생자는 모두 27명(남성 26 명, 여성 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