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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5회) • 평북 철산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2) 107 는지 여부와 재판관할권 문제로 판결이 나오는데 1 년 8개월의 시일을 끌었다. 이명룡은 마침내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2년 수형 기간 중 360 일이 미결기간으로 본형에 산입되어 나머지 1년 5일 의 형기를 채우고 1921년 11월 4일 마포의 경성감 옥에서 석방되었다. 2년 8개월의 옥중생황은 이명룡 에게 신앙의 연단 기간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성경을 40독했다. 출옥 이후 활동과 사망 출옥 후 이명룡은 이상재 등이 주도하던 물산장려 운동에 참여했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큰아들 이경화가 설립한 신안학교 이사장에 취임했다. 일제의 패망 이후,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이 평 양에서 창당한 조선민주당의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 었다. 그러나 조만식이 신탁통치 문제에 북한 방침과 달리 반대를 결의하자 소련 군정이 조만식을 연금하 고, 이명룡도 가산을 몰수당하는 탄압을 받았다. 이 에 그는 1947년 4월 25일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이명룡은 서울에서 애국동지원호회 고문, 3·1정신 선양회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열 사 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맡았다. 또 김창숙 등과 함께 자유당 정권에 맞서다 1956년 11월 12일 새벽 충무 로 자택에서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84세 였다. 그의 장례는 12월 20일 오전 중앙청 후원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 서하였다. 이처럼 이명룡은 철산이 낳은 대표적 독립운동가 로, 철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 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다음 호에서는 3월 5일 차련 관 시위와 3월 7일 철산면 시위로 이어가고자 한다. (계속)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민족대표 29인이 서울 태화관에 모여 3·1운 동을 주도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독립기념 관 소장)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시작된 경성(서 울)의 탑골공원 팔각정. 뒤에 보이는 탑은 원 각사지 10층석탑이다. 3·1운동 당시 서울 덕수궁 앞의 만세시위  광 경(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