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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당시21세)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6년 9월 8일 전남 화순 출생 1985년 2월 전남여고 졸업 1985년 3월 서울교대 수학교육학과 입학, 서클 UNSA∙학회∙학보사 가입 1985년 5월 서울 청담교회 대학생부 활동 시작 1986년 5∙3 인천투쟁, 11∙29 신민당 개헌 현판식 투쟁 등 참가 1987년 2월 20일 학내 비민주적 학사운영 및 미제국주의 매판세력의 지배를 받는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분노∙항의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자결함 |21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전두환정권 학생 동지의 삶과 죽음 어릴 때부터 주관이 뚜렷하고 자의식이 강했던 동지는 중2 때 광주항쟁을 간접 체험하고 고교 시절 대학생이던 오빠가 탐독하던 사회과학 서적을 즐겨 보는 등 대학 입학 이전부터 남다른 사회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동지는 ’85년 서울교대에 입학한 후 수학과 학회와 교내 서클 UNSA, 학보사 에서 활동하였고, 학교 측의 학회와 서클의 해체 조치 이후에는 선배를 통해 소 개받은 서울 청담교회 대학생부 활동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교내 서클인 UNSA 의 학습내용과 활동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85년 8월부터는 청담교회 대학생부 활동 및 교회대학연합서클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서울교대는 전두환 정권 시절의 다른 학교보다도 더 악질적인 교육 관 료들의 횡포로 인해 학내에 지하 취조실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교대는, 학장 정 태수의 지휘 아래, 학생들이 숨을 쉬고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개 RNTC 교관 이 시도 때도 없이 학생을 불러 취조를 했고, 많은 학생들을 프락치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지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함구했으며, 보안을 철저히 유지 했다. 그러나 이미 동지는 학교 측으로부터 문제학생으로 지목 받아, 수업시간에 도 수시로 불려나가 취조와 협박을 당하는 처지였다. 이런 현실에 맞서기 위해 동지는 부단한 자기 노력을 거듭했다. 어느 날 일기에 적힌“이 땅 한반도에 사는 신종속국의 모든 백성이여! 패배자가 아니라 승자가 되어 후세에게 떳떳이 자랑할 수 있도록 일어나자. 일어나자. 백두에서 한라까지 힘찬행진으로 새 아침을 맞이하기위하여”라는 글과 같이 살아가고자 했다. 동지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가족들에게 미칠 영향으로 고민하기도 했지만 결 국“죽어 다시 깨어나라. 진정 역사가 원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힘을 길러 나오 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목숨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투쟁을 승화시켰다. 이후 학교 당국은 그런 그의 죽음조차 이성관계에 의한 자살로 왜곡하는 반인 륜적인 작태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러나 ’87년 6월, 억압적인 교대의 현실을 거부하고 들불처럼 일어난 교대 학 우들의 빛나는 투쟁 이후 동지의 죽음은 새롭게 재조명되었다. 끝내살리라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