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page

106 2025년 6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15회) 城)으로 압송되었다. 이명룡은 경무총감부에서 신문을 받고, 기소된 105인의 한 사람으로서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 았다. 그러나 워낙 터무니없이 사건을 조작하였던지 라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그는 출옥 후 요시찰 대상이 되어 감시를 받았다. 그는 숨을 죽이며 조용 히 종교 활동에 전념하면서 이승훈 등 신민회 동지들 과 교류를 계속했다. 3·1운동 민족대표 1918년 말, 신문에서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보도했다. 이명룡은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승훈, 양전백 등 과 함께 독립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의논했다. 1919 년 2월 선천 사경회(査經會) 때 이승훈을 만나 밤늦게 까지 독립선언 및 동지 규합 방법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이승훈은 2월 12일 최남선으로부터 급 히 상경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상경했다. 이승훈은 송진우, 최남선, 최린 등을 만나 천도교 측에서 추진 하고 있는 독립선언 계획을 들었다. 이승훈은 천도 교 와 손을 잡기로 하고 2월 14일 평양에서 길선주 등 장로회 지도자들을 만나 천도교의 움직임을 전하며 3·1 독립선언 계획을 논의했다. 이어 이승훈은 평북 노회가 열리던 선천으로 가서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이명룡,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등 4인에게 거사 계 획을 재차 설명했다. 이명룡을 비롯한 4인은 민족대 표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이명룡은 2월 15일 상경하여 이승훈과 함께 행동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이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다. 그 시각 철산 출신 두 청년 정석해와 이경화는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식 에 참석했다가 민족대표들이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태화관으로 달려갔었다. 정석해는 연희전문 학생으로 등사판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철 산에 우송했다(지난호 참조). 이경화는 이명룡의 아 들이었다. 태화관에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 참석한 민족대 표 29명 전원이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민 족대표에 대한 재판은 독립선언이 내란죄에 해당하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 스 코틀랜드 출신으로 만주에서 최 초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  이명룡은 1902년 평북 정주에서 존 로스 선교사에 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882년 존 로스에 의해 최초로 한글로 번역된 누가 복음(『예수성교 누가복음 전서』)(이상 필자 제공) 이명룡의 서대문감옥 수감시 모습(국사편찬위원회 ,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