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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25년 4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① 는 4월 10일 훈련원 뒤 청계천 냇 가에서 같은 의병출신인 이용규 (1859-1924)를 은밀히 만나 국 민대회의 13도 대표로 서명할 것 을 제안한다. 이용규는 의병장 민 종식의 매제로 유생에 상당한 영 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3·1운동의 열기를 모아 전국 13 도의 대표자를 소집하여 임시정 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인천의 만국공원, 서린동의 봉춘 관 등지에서 회합을 거듭하였다. 실제로 보신각 앞에서 개최된 4 월 23일의 국민대회에서는 이용 규가 포함된 13도 대표자 25명의 명의로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 민대회 취지서」 등이 배포되었다.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하는 이 임시정부(한성임시정부)의 등 장은 이보다 앞선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 정부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지명한 바 있어 상당기간 혼선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9년 9월에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 부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 의회, 서울의 한성임시정부를 합 치는 형식의 통합임시정부를 구 성하는 것으로 수습된다. 청계천 다리 밑에서 만세를 선창한 천세봉 동양선교회 학생 천세봉(1904 ~?)은 1926년 6월 10일 오후 1시 10분경에 순종의 장례 행렬이 훈 련원에서 동대문 전차 차고로 통 하는 청계천 다리를 통과하려는 찰나 그 다리 밑에서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손으로 흔들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천세봉이 만 세를 외치자 부근에 모여 있던 봉 송 인민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천세봉은 이후 일제 경찰에 체포 되었다. 경북 군위 출신의 천세봉은 보 성학교를 중퇴한 후 고향에서 근 일학원 교사와 조선일보 군위지 국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9개월 전 다시 상경하여 성서학원에 다 니고 있었다. 천세봉은 이 사건으 로 보안법 위반죄가 적용되어 징 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 았다. 전태일다리와 평화시장 전태일이 1964년부터 일한 평 화시장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리 ➐ 이용규가 포함된 13도대표자 25명의 이름으로 1919년 4월 23일 배포된 국민대회 취지서(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➑ 1926년 6월 18일 동대문 부근에서 체포된 천세봉(동양선교회 학생)의 모습(「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➐ 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