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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➊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⑳ 105 6·10만세운동과 청계천 관수교 관수교(觀水橋)는 청계천에 놓 여 있는 여러 다리 가운데 종로3 가역과 을지로3가역 사이에 있 는 다리이다. 이곳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 때 장례 행렬 의 동선을 따라 거행된 6·10만세 운동의 현장이다. 당시 관수교 만 세운동은 이선호(1904~1950) 등 이 주도한 단성사 앞 만세운동과 비슷한 시간인 8시 40분경 연희 전문의 이병립(1904~?)과 박하순 (1904~?) 등이 주도하여 시작되 었다. 두 학생이 「격문! 이천만 동 포여,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대가 는 자유다. 대한독립만세」라는 제 목의 격문을 살포하며 구호를 선 창하자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호응하 였고, 인근에 있던 보성전문학생 들도 이에 호응하고 나섰다. 이병 립과 박하순은 현장에서 체포되 었는데, 당시 6·10만세운동으로 일경에 검거된 학생수는 서울에 서만도 210명, 각 지방에서 체포 된 학생까지 포함하면 1천여 명 에 이른다. 6·10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혁명파)가 중심이 되 어 제2의 3·1운동을 목표로 준비 해왔다. 그런데 거사 직전에 인 쇄물이 발각되어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주도하던 권오설(1907~ 1930), 박래원(1902~1982), 민창 식(1899~1938) 등이 체포되면서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조선사회 과학연구회의 사직동계(평동계) 학생들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통동계 학 생들의 준비가 무사히 이루어지 면서 성사될 수 있었다. 청계천변 대동단의 최익환집터 청계천 배오개다리 남쪽에는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의 최익환 숙소 터(주교동 125번 지)가 있었다. 이곳에서 1919년 4 월 중순경 「대동단 선언서」, 「진 정서」, 「경고문」, 「방략 및 기관」 등을 등사로 처음 인쇄하였다. 최 익환(1889~1959)은 이후 종로5 가로 이사하여 권태석이 내놓은 600원으로 활자와 종이를 구하 여 활판 인쇄로 선언서 등을 제작 하여 배포하였다. 대동단은 전협 (1876~1927)과 최익환이 중심이 되어 조선 민족 각 계급을 망라한 조직 건설을 목표로 출범하였다.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유림 (儒林)·종교·교육·상공·노동 등 여 러 층으로 나누어 11개 단(團)으 로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전 국적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이 때 최익환은 대동단의 선전활동 을 주관하면서 각종 인쇄물 등을 작성하고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 다. 대동단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 들인 ‘의친왕 이강공(李堈公) 탈 출 사건’으로 유명한데, 1919년 11월 추진된 작전이 압록강 건너 안동(安東, 현재 단둥)에서 이강 (1877~1955)이 일제에 체포되는 바람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해방이후 최익환은 남북 이 분단되어 결국 동족상잔의 전 쟁으로까지 이어졌을 때 남북을 오가며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의열 단과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약했 고, 해방 이후에는 제2대 공군참 모총장을 역임한 최용덕(1898~ 1969)은 최익환의 셋째 아들이다. 청계천변 모랫가에서 이용규를 만난 김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 후 이규갑(1888~1970), 김사국 (1895~1926) 등과 함께 4월 23 일의 국민대회를 준비하던 의병 출신 김규(김교훈, 1880~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