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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당시22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5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 출생 1983년 2월 혜광고등학교 졸업 1984년 3월 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1986년 4월 11일 노학연대 활동중‘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참가하여 구속 1986년 7월 15일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으로 출소 1987년 1월 13일 치안본부 대공분실 요원에 의해 연행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폭행으로 운명 |20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전두환정권 학생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서울대 언어학과에서 학생회장을 맡아 중심적으로 학생활동을 전개하 다 ’86년 노학연대 투쟁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어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하였다.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동지는 ’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 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선 배이자‘민추위’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 위해 동지가 연 행된 것이다. 동지는 14일 오전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았고, 11시 20분경 중앙대 용산병원에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경찰은 초기 발표에 책상을‘탁’치니‘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 며 발뺌을 하였으나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의 흔적 과 사타구니, 폐 등이 엉망이 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 등이 들렸다는 사실에 근거해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 다. 그러나 치안본부는 고문담당자를 축소은폐하고 가족의 허락도 없이 벽제화 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부영 전민련 상임의장과 천주교 정의평화구 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에 의해 고문살인의 은폐사실이 밝혀지고 이로인한 범국민적 투쟁의 결과 결국 치안본부는 고문살인의 은폐, 조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자비한 고문살해에 연이어진 계속된 은폐조작은 모두 내무부, 치안본 부, 안기부, 보안사, 검찰 등이 모인‘관계기관 대책회의’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위에 전두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4.13 호헌선언을 발표함으로 써 자신의 종말을 향해 질주하였다.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박 종철 고문은폐조작 및 호헌선언 반대 범국민대회’를 열었고, 이를 통해 전두환 군사독재 지배체제의 엷은 그물이 산산조각 났다. 전두환정권의 폭력성, 기만성, 막무가내는 마침내 6.29 항복선언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끝내살리라 |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