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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4 제주4·3유적 Ⅰ _ 제주시편 그러나 한림 주민들의 인명피해는 다른 중산간 마을과 비교하면 많지 않은 편 이다. 한림리가 토벌대의 근거지로 바뀌면서 군경토벌대가 다수 주둔해 무장대의 습격을 받지 않은 반면, 한림에 주둔한 토벌대는 한림리 인근 해안마을로 내려온 소개민들을 항상 무장대 동조자로 의심하며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한림에서 가장 끔찍한 학살사건은 1948년 11월 16일 발생했다. 이날 정오께 9 연대 군인들은 한림중학교에서 수원리 강두형(18, 남)과 이경혁(20, 남), 좌태봉 (18, 남)과 귀덕리 김계준(16, 남) 등 학생 4명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공개총살 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좌익교사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 토벌대는 학생들 에게 학생연맹(학련)을 조직해 자신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림중학생 총살은 다른 학살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 후 한림국민학교에 주둔 했던 토벌대는 특히 무장대가 해안마을을 습격한 1948년 12월 3일(금릉 습격)과 1949년 1월 3일(협재 습격)의 두 차례 사건 이후 소개민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고 문하고, 총살했다. 그러자 무장대도 몇 차례 더 한림 지역을 습격했고 이 과정에 서 주민들이 살해됐다. 한편,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에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한림면의 중산간 마을에도 소개령이 내려져 소개민들은 한림 등지의 해안마을로 속속 소개했다. 한림 지역은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해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1948 년 말부터 1949년 봄까지 4·3장성(長城)을 쌓았다. 이 장성은 애월읍 경계지역인 귀덕4구에서 월령 1 까지 한 줄로 길게 쌓았다. 이 장성에서 벗어나 있는 마을은 모 두 소개됐다. 한림 주민들이 학살된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8년 12월 11일: 문관백(52, 남)과 송병하(38, 남) 2명이 보초 근무 중 무장대에 피살됨 12월 23일: 양경생(39, 남)과 홍성도(31, 남) 2명은 한림리 물왓에서 토벌 1) 당시는 한경면이 한림읍에서 분리되기 이전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 한경면과 경계 지역인 월령리까지만 장성을 쌓았다.